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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summer,
love.

なぜか君と歩きたかった海辺。

20210718 나기이바 합작

소란(騷亂)

w. 송화우연

BGM

   원래부터 사에구사와 자신의 집에는 그의 인기척만이 유달리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크게는 책 넘기는 소리, 찻잔을 내려두는 소리 정도만 나던 자신과 다르게 서재 문을 여닫는 소리, 거래처와 통화하는 소리, 쌓아둔 서류를 하나씩 넘기다가 파일철을 덮는 소리, 키보드를 쉴 새 없이 두드리는 경쾌한 타자 소리까지. 이 집의 소란스러움은 전부 그의 차지였다. 란은 그런 그의 소리를 듣는 걸 좋아했다. 특유의 또박또박한 어투로 통화하며 계단을 내려올 때면 그의 목소리가 어떤지 듣는다던가, 서류를 넘기고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열린 사이로 새어 나오면 그가 무슨 일이 있는지 서재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쌀쌀맞게 자신에게 시선을 주면서도 아는 체는 하지 않던 그는 약간의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상념에 잠기지 않고 쉴새 없이 일에 몰두했다. 마치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듯, 지금은 아무런 상념에 젖기 싫다는 듯이 숫자를 들여다보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계획을 세우는 그. 란은 내쉰 숨을 도로 들이켜 한숨으로 내뱉는 그에게 걱정 어린 말을 얹어 볼까 하다가, 그것을 그만두고 그가 오지 않는 거실 소파에서 그가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 맞춰보았다. 그것이 마치 돌이킬 수 없는 삶을 이어나가는 활력이라도 된다는 양, 란은 기쁘기 마지않는 얼굴로 그의 작은 소란스러움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소음이 잠시 가라앉게 되는 때는 대체로 그가 죽은 듯이 잠들 때뿐이었다. 란은 그가 잘 자라는 인사도 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잠이 들 때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의 옆자리에 누웠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가락과 입술이 그때만큼은 공기 중 모든 정적을 머금고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미약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방전된 몸을 충전하는 그는 일상의 가장 조용한 부분에서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란은 그에게 닿지 않을 만큼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눈가를 쓸어보았다. 아주 맑은 푸른 하늘을 담은 눈동자는 그가 사랑스러워 마지않는 부분 중 하나였기에, 란은 자는 중에는 그와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애가 달았다. 하지만 그것도 무척 짧은 시간이었으니 그는 기다릴 수 있었다. 찰나의 휴식시간, 그 속에서도 그의 거뭇한 눈 밑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란은 적어도 그가 과로로 죽지는 않을 거란 미약한 확신이 드는 밤을 보냈다.

   그런 그의 소음은 한동안 이어지고 끊기기를 반복하다가, 갑자기 계절이 바뀌면 사에구사는 그대로 물을 맞은 먼지처럼 고여있었다. 그런 시기가 온 걸까. 란은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창 너머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에구사가 조용해진 것은 여름이 시작한 뒤부터였다. 항상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는 집안에서 그가 방해받을 만한 건 없었음에도 그는 날씨가 무더워지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장마에는 점차 움직임을 줄이기 시작했다. 그가 업무를 보는 시간이 줄어들자 집안을 가득 채우던 소음도 점점 줄어들었다. 비가 많이 내리면 내릴수록,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는 특유의 큰 목소리를 죽이고 말 수를 줄였다. 집 안을 가득 채우던 소란스러움은 비에 젖어 녹아버린 듯이 자취를 감췄다. 서재 앉아서 불도 켜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많아졌을 무렵, 란은 그에게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괜찮지 않아 보이는 그에게 굳이 말을 얹는 게 소용없어 보였기에 그는 아주 조용히 자신에게 대답하지 않는 그의 곁에서 공허한 그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쉴새 없이 푸르르면서도 잿빛을 담은 눈동자는 당장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연달아 사흘가량 장대비가 내린 날에는 침대 밖으로 나오지조차 못해 란은 방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으로 하루를 내리 보내기도 했다. ‘이바라, 비가 많이 오지만 금방 그칠 거야. 괜찮아.’ 란은 방 밖에서 그를 부르며 말을 던져보았지만, 그는 끄덕이지조차 않았다. 역시 이번에도 그냥 지나치기는 힘든 걸까. 란은 그저 방 밖에 우두커니 서서 그가 비를 뚫고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소란이 습한 물기에 뒤섞여 녹아버린 집은 비가 창문을 치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다는 듯이 거세게 떨어지는 물방울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사에구사는 눈을 뜨고 있었음에도 물먹은 솜처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가끔 비가 잦아들면 그는 창가에 앉아 밖을 바라보는 것이 그의 움직임이 다였다. 천둥 번개가 치고 관리가 되지 않아 엉망이 된 정원에 시든 화초들이 굴러다니는 광경을 신기할 게 없다는 듯이 내려다보던 그는 비가 점차 거세지면 도로 눈을 감고 꿉꿉함이 들어차지 못하는 집 안에서 존재하기만 했다. 평소와 같은 소란스러움 없이, 그 무엇도 하지 않은 채 누워서 공간을 채우고만 있는 그는 비 내리는 창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따금 그는 비가 창문을 너무나 세게 때릴 때면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쓰고 겨우 나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끄러워….”

   원래였으면 그의 소리만이 가득했을 그와 자신의 집은 빗소리가 가득해졌다. 금방이라도 집에 들어차겠다는 듯이 무례하게 창을 때리던 빗줄기는 밤낮없이 그를 괴롭혔다. 란은 이불로 쌓인 그를 미약하게 쓰다듬어주며 어둑한 집안을 둘러보았다. 빛이 드는 곳이 하나 없는 먹구름이 낀 온 집안은 사람이 산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삭막하게 느껴졌다. 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장마를 이기지 못하고 물을 잔뜩 먹은 제습제처럼 무거워진 그는 스스로를 어찌할 방도를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란은 그럴 때면 그의 귓가에 다정히 이름을 불러보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말들을 쏟아내었다. 빗소리가 그를 덮치지 못하게,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이바라, 조금만 기운 내. 비는 금방 그칠 거야. 무서워할 필요 없어. 금방 그치게 될 거야. 다시 더워질 일만 남았는데 그건 걱정 안 되려나. 이바라, 이바라. 그의 이름을 여러 번 부르고 나면 자신이 괜찮아졌듯이 란은 그도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나아지길 바랐다. 방 안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머리칼을 쓸어주던 란은 번데기가 된 채 다시 잠에 빠져든 그의 곁에서 이제는 장대보다도 더 험하게 쏟아지는 밖을 내다보았다. 그날도 그랬었는데. 그 기억을 떠올리고 나니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거센 비가 내리는 날은 그 누구에게도 좋은 날은 아니었기 때문일까. 란은 침대에 누워 온기 하나 없는 그의 곁을 지켰다.

   사에구사가 침대에서 일어난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잠깐 그에게 감화되어 필요 없는 쪽잠을 청한, 비가 아주 잠시 그친 밤이 스쳐 간 새벽. 란은 침대에서 누군가 비척비척 일어나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오늘도 이불 속에 머리를 넣고 연신 중얼거릴 듯한 그가 수척한 얼굴로 마지못해 방을 나서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랐다. 이번 장마는 너에게 너무 가혹한가, 그러면 너는, 이바라는, 설마. 속으로 중얼거리던 말이 불안을 부추겨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란은 입술을 짓이기며 얇은 담요만 어깨에 두른 그를 뒤쫓았다. 길지 않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고 빗소리가 잦아드는 지하실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그는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늘져 있었다. 먹구름이 드리운 그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란은 천천히 반쯤 열린 지하실 문으로 내려갔다. 잘 꾸며둔 지하실은 여전했다. 흰 러그가 깔린 바닥, 푹신한 천 소파 큰 화면이 달린 TV가 창문 대신 달려있었다. 그의 취향이라고는 하나 없는 메말랐지만 따뜻한 지하실. 사에구사는 익숙하다는 듯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옆에 서 있는 램프의 불을 켰다. 은은한 빛에 의지해 항상 같은 자리에 놓인 리모컨을 조정한 사에구사는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TV는 켜지자마자 이미 그가 무엇을 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영상 목록을 띄웠고 사에구사는 머뭇거림 없이 단 하나의 영상을 재생했다. 사에구사는 검은 화면이 나오는 동안 안경을 벗어 피곤함이 찌든 눈으로 그 영상을 보기 위해 손바닥으로 번갈아 누르며 초점을 맞췄다.

   [이바라.]

   영상이 시작되자마자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란은 스스로의 불안이 그대로 실행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 한 편으로 먹먹함을 느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지하실, 그는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을 가만히 응시하며 사에구사와 시선을 공유했다. 저 안에서 웃고 있는 너는 저렇게 필적할 것 없이 다채로운데 어째서 이런 장마를 맞은 걸까. 란은 답을 아는 질문을 거듭하며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고 쉬면 안 돼?]

   [안됩니다.]

   은은한 빛밖에 남지 않은 이 지하실은 빗소리도 그 무엇도 들어오지 못했다. 아니,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그가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란은 소파 뒤편에 선 채로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에구사의 정수리를 응시했다. 흰 소파 위에 유일한 색채. 어둑한 지하실 안에서도 은은한 빛을 띠는 죽지 않는 붉은 자줏빛. 란은 천천히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뗐다. 그러나, 사에구사는 그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다시 리모컨을 들어 영상을 멈췄다. 항상 같은 곳, 같은 장면에서. 란은 목소리를 내는 대신 시선을 들어 그가 멈춘 화면을 바라보았다. 항상 사에구사였던 카메라의 피사체가 은발의 사내로 바뀌어 있었다. 란은 자기 자신을 화면 너머로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휘어진 눈꼬리,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를 말하려 벌어진 입술, 누군가의 손길로 묶인 머리는 단정했고 주변은 무척이나 환했다. 환한 여름날의 하늘을 담은 모습. 장마는 생각도 못 할 오뉴월의 하늘은 쨍한 색채가 그때의 기억 속을 가득 드리우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그려지는 그 날의 빛. 그중에서 가장 반짝이고 내 마음속을 소란하던 건 너였는데.

   “...그날 그냥 말씀드릴 것을 그랬습니다.”

   며칠간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장마의 척척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곧장 사에구사의 곁에 앉아 메마른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 장맛비가 내리는 지금도 여전히 푸르른. 란은 달싹이는 입술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알고 있었다. 그가 하려는 말, 그리고 영상 속 자신이 내뱉으려는 말이 어떤 말인지도 알고 있었다. 항상 장마 중턱을 넘기지 못하고 내려오는 지하실은 어떤 곳인지, 색채가 가득한 영상의 내용은 무엇인지, 무례하게 그와 자신의 집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그가 어째서 기피 하는지.

   “...감히…. 사랑한다고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얼굴에 스탠드의 빛이 드리웠다. 먹구름이 드리운 가운데에서도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눈물 날만큼 푸르렀다. 물기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 잿빛이 뒤섞인 푸름이 그 어떤 때보다도 척척해 보이는 건 역시 장마 때문이었으리라. 란은 자신을 향하지 않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돼. 나는 여전히 듣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에서만 담고 있던 말을 쏟아낸 란은 숨조차 고르지 않고 그를 불러보았다. 영상에서 자신이 그를 불렀던 것처럼 다정하고 나직히. 누구보다 사랑을 담아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내뱉었다. 하지만 사에구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여전히 영상 속 그 인영에 시선을 빼앗긴 그는 그대로 힘없는 손을 뻗어 영상을 도로 재생시켰다.

   [사랑해, 이바라.]

   사에구사는 그 고백을 듣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고백을 똑바로 응시한 채 한없이 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망각을 위해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음에도 이별조차 잊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란은 그런 그의 곁에서 닿지 못하는 손으로 자줏빛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못한 촉감이 그대로 아스러졌다.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

   입술을 벙긋거려도 말이 닿지 않는다. 이미 쏟아지는 빗소리가 이 지하실에 닿지 않는 듯이. 하지만 그의 푸른 눈은 밖과 다를 바 없이 물줄기가 쏟아졌다. 빗줄기는 그것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서조차 그를 괴롭혔다. 사에구사는 끝나기 직전에 다시 영상을 처음으로 돌렸다. 그리고 물기가 서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 흐린 눈으로 스크린 속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며 장마를 내리받아내었다. 여전히 빗소리가 요란한 장마는 지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비를 가리고 있는 그와 자신의 집은 흠뻑 젖어 마를 날이 없었고, 그건 사에구사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해…, 이바라. 사랑해….’

   란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닿지 않는 사랑을 여러 번 속삭였지만, 이미 곁에서 사라진 목소리는 닿는 법이 없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 사에구사가 리모컨 버튼을 누르는 소리, 그리고 연기처럼 홀연히 흩어져 버리는 영상 속 란의 ‘사랑해’. 그날도 여전히 란과 사에구사의 집에는 사에구사의 인기척만이 남았다. 얼핏 그 시끄러운 정적 사이로 소란한 빗소리가 들어찼다. 장마가 그를 녹이는 소리였다.

BGM: 불꽃심장 (Flaming Heart) - 차가운 여름의 밤이여
https://youtu.be/OFaZ3okPn3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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