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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
love.
なぜか君と歩きたかった海辺。
20210718 나기이바 합작
SUMMER SAKURA
w. 익명A
BGM
...여름, 죽어버렸으면!
이바라에게 신기한 능력이 생긴 것은 지난 여름,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 뾰로롱 뾰롱 뿅 하는 통통 튀는 시티팝 재질의 노래가 거리에 잔뜩 울리는 싱그러운 여름날. 맑은 하늘에 시원스럽게 소나기가 내리고 도시엔 온통 풀내음이 가득했던 날.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는 소리, 장화를 신은 한껏 신이 난 발이 물웅덩이를 힘차게 밟는 소리가 귓가를 메우던 그런 어떤 이상적인 여름날, 별안간 생긴 일이었다.
저 새끼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 하고 있지? 이건 이바라의 가장 기본적인 속마음이었다. 상대의 언어적 정보와 비언어적 정보를 누구보다 예민하고 빠르게 캐치해 머릿속에 밀어넣어서, 보다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합리적이고 이 쪽에 유리한 계산을 해 내는 것. 그것이 협상과 교섭의 기본 바탕이였으니까.
무엇보다 이바라에게 상대의 정보라는 건 생계 수단이기도 했다. 군대에 있을 때도, 영문모를 재산을 상속받아 어른들 사이에서 이 악물고 사업체를 키워나갔을 때도, ES에 들어와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는 중에도. 이바라의 그런 과잉정보처리 능력은 상당이 유용한 기술이였다.
그럼에도 그가 자랑하는 나기사는 속내나 생각하는 바를 참 알기 힘든 사람 중 하나였다. 대화할 때 전심 전력으로 그의 정보를 취합해 보려 해도, 그렇게는 판가름 나지 않는 이바라 인생 최대의 난적 같은 사람.
그런데 이제, 거기에 판타지 한 스푼이 얹혀지는 바람에.
SUMMER SAKURA
나기사X이바라
상쾌한 아침, 모닝커피 한잔. 교복 대신 ES 출근복장으로 가볍게 차려입고 모닝커피에 토스트 한 입. 이바라의 그 날 아침은 완벽 그 자체였다. 이른 시간에 개운하게 뜨인 눈보다 기분 좋은 것은 없었다.
힘찬 발걸음으로 학교 대신 사무실로 출근하는 중에도 이바라는 연신 기분이 좋았다. 균형잡힌 아침식단을 무사히 각하에게 전달드리고, 아침에 업데이트 되는 경제기사와 연예기사들을 가볍게 훑어보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이른 시간의 새벽 바람이 살랑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사무실에 들어와 앉기까지, 이바라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어쩐지 일도 잘 풀릴 것 같은 예감.
‘베이컨 한 장 더 달라고 할 걸.’
노트북을 켜고 문서창을 탁 켜는 순간,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뭐지, 싶어 주변을 둘러봐도 갑자기 자신에게 베이컨 얘기를 할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회의실에 귀신이 있단 얘기는 어렴풋 들은 적이 있지만, 그렇게 오싹한 느낌도 아니였고 무엇보다 내용이 귀신에게 어울릴만한 내용은 더더욱 아니여서 이바라는 뭘 잘못 들었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제 그제 아이돌 스케쥴을 나간 사이 들어온 업무 연락들과 스케쥴을 빽빽하게 정리하고 나니 어느덧 열한시가 좀 넘어가고 있었다. 점심은 어떻게 할까, 오늘은 학교에 얼굴 도장이라도 찍고 와야 하나- 쥰의 스케쥴은 지금 어땠더라, 각하의 점심 식단은 오늘 어떻게 챙겨 드렸더라.
나기사의 현재 스케쥴은 개인 트레이닝, 오후 스케쥴로는 이제 곧 찍게 될 여행 예능의 인트로 같은 브이로그 촬영 정도만 있었다. 점심은 그럼 가볍게 드시게 하고- 촬영 후에 적당히 맛있는 걸 채워넣는 편이 좋으려나. 최근에 드시고 싶다고 하신 건 디저트 류 밖에 없었고. 어차피 여행일기 촬영 중에 이것저것 많이 먹을 게 분명했다. 아주 기대하고 있는 얼굴로 스케쥴 표를 몇 번이고 살피는 것을 봤으니까.
‘빙수... 음, 초코 빙수.’
이바라는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초코빙수를 원하는 듯 한 말소리가 귀를 스쳐 지나갔다. 얼핏 들어서야 뭐였지? 싶을 정도로 작고, 순식간에 지나간 소리. ..아까 베이컨도 그렇고, 이 건물에 무슨 걸신들린 귀신이 있는 게 아닌지. 아니면, 시이나 니키 씨가 사무실 어디 숨어 있기라도 한 건지. 이바라는 하여간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신경쓴다고 해결 될 문제도 아니었고, 차피 층간소음이나 옆 회의실의 말 소리가 작게 들렸겠지 하는 정도의 생각으로 넘겨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점심 시간이 조금 넉넉하게 남아 직접 점심을 차려드릴까 했던 생각을 했었는데 금새 들어온 기획안 수정안과 검토사항들에 이바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좀 쉴까, 하고 커피를 타러 일어나니 창 밖으로 쨍하고 높은 여름 하늘이 펼쳐졌다. 날씨 더럽게 좋네, 진짜. 괜시리 바빠진 일에 작게 짜증이 나는지 그는 괜히 입술을 비죽였다.
나기사에게는 식단을 꼭 챙겨 드시라는 말과 함께 식당으로 연락을 넣었다. 아마 니키 씨가 잘 챙겨 주겠지.. 하며 바쁘게 서류철을 뒤적였다. 상쾌하게 일어나 완벽할 것 같던 하루의 기분좋음은 언제부턴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얼굴 보고 싶은데.’
..먹는 얘기만 하는 귀신은 아니였나 보네. 이바라는 실없이 웃으며 서류철을 넘기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느낌이 좋았는데, 반대였나?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서류와 모니터 화면을 번갈아 바쁘게 바라봤다. 여행 프로그램은 자유여행 방식으로, 이 쪽에서 전면 일정 진행을 맡아서.. 예산에 제한은 있나, 전하가 계셔서 그런 점에서 상한선이 있지 않으면 곤란한데-
“....이바라.”
“아, 각하? 여기는 어쩐 일로 귀한 발걸음을 해 주셨습니까?”
...응, 점심은 맛있었어. 그는 이바라의 말에 동문서답으로 대답하며 사무실 한켠 소파에 앉아 익숙하게 차를 우려냈다. 그 모습에 용수철처럼 일어난 이바라가 재빠르게 적당히 담백한 식감을 가진 비스켓을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아아, 자신이 대접해드려야 하는데,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결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행 일정이 궁금해지셔서 미리 와 주신 거라면 오늘 저녁 로그 형식으로 남기는 촬영 전에 에덴이 모두 모였을 때 전달해 드릴 것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아니면 혹시 자신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이 사에구사 이바라, 각하의 모든 말씀은 마음속에 하나하나 깊이 새겨 넣고 있으니 얼마든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무실은 각하께서 독서나 취미생활을 즐기시기에는 자신이 충분히 환경을 조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혹시 적절한 공간을 찾고 계신다면 아래 도서실이나 휴게실 쪽으로 이동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각하!”
“....응, 갑자기 찾아온 건 나니까. 이바라가 신이 아닌 한, 인간은 그런 불확실한 미래까지 모두 대비할 순 없어.”
그러더니 그 소파에 가만히 앉아 태연하게 들고 온 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로비층이나 휴게실로 옮기시지 않는 건가. 이바라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뒷 목을 쓸며 다시 기획서에 집중했다. 이쪽이 유리하게 풀어나갈 수 있을 만한 구멍은 남겨놓되, 전체적인 그림이 붕괴되지 않을 만한 룰을 남겨놓고, 동시에 최고의 그림과 극적인 이벤트를 일으킬 수 있을 만한 장소도 미리 물색해서 이따가 프레젠테이션을 할 참이었다. 관찰식 버라이어티는 이래서 싫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어쩔 수 없이 날이 서고 각하를 위한 대본집을 미리 마련하고, 전하를 설득해서 리얼을 논리얼로 만든 다음, 그 논리얼을 리얼로 보이도록 또 움직여야 했다.
사락사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마치 백색소음 같이 들려 좀 더 집중이 잘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래서 요즘 대세가 ASMR 인 건가, 짧은 감상도 덧붙이며 바쁘게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대본을 써내려가는 중에 또다시 툭, 속삭임이.
‘입이 고양이 입’
“네?”
“...?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아, 죄송합니다. 각하의 독서시간을 방해했네요. 오늘따라 옆 회의실인지 어딘지 모르겠는데 말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기분이 들어서 말입니다. 괘념치 마시고 하시던 독서를 계속 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기사는 예의 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는 평온한 얼굴로 눈을 꿈벅이며 이바라를 바라보고 있어서, 이바라는 머쓱한 듯 웃어보이며 다시 기획서로 고개를 숙였다. 아까보다도 더 크고 정확하게 들렸는데. 아침에 컨디션이 좋은 줄 알았는데 정 반대였나, 여유 있을 때 병원이라도 다녀와야 하는 건가.. 원래 환청이라는 게 저런 실없는 소리가 들리는 거던가? 초코빙수니 베이컨이니 고양이 입이니 하는 소리나 들리는 게.
이바라는 병원 스케쥴은 또 어디에 끼워 넣어야 하나, 시선을 들어 창문을 바라봤다. 여전히 청명한 하늘에 태양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기분 좋은 여름을 그대로 가져다 그린 것 같은 풍경. 아침까지는, 정말 아침까지는 저 풍경이 마음에 들었었는데 뭐 이리 날씨는 좋고 난리냐고 짜증이 났다. 병원은 프레젠테이션을 한 후에, 각하의 브이로그를 연출해서 편집부에 넘긴 후 그 사이에 다녀오면 될 성 싶었다. 오늘 저녁 식단도 식당으로 연락을 미리 해 놓아야...
‘짜증난 부리 입’
병원, 시급한 거 아니야?
이바라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어쩐지 아침에 일진이 좋더라니.
-
여름은 계속 이바라를 제외하고 완벽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상하리만치 덥다가도 시원한 소나기가 한차례 그 열기를 기분 좋게 식혀주곤 지나갔다. 사방에서 생기가 넘쳤다. 여름 날씨가 완벽해서 기분이 좋은 히요리가 그랬고, 그 넘치는 에너지에 살짝 지치지만 그게 또 어떻게 자전적인 에너지로 돌아가는 쥰이 그랬다. 전하가 기분이 좋으면 덩달아 같이 기분이 좋은 각하도 있고, 병원에서도 병명을 알아내지 못한 채 은은한 환청에 시달리는 이바라만이 완벽하게 이 여름에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에덴에게 여행 버라이어티의 프레젠테이션을 간략하게 마치고, 숙소에서 짐을 싸는 각하의 대본을 준비하고 연출을 맡는 동안에도 은은한 속삭임은 계속되었다. 날씨 좋다는 날씨 감상부터 눈동자가 크고 동그랗다느니 손이 쪼그맣다느니 아기 손목 같다느니 하는 잔잔한 관찰일기 같은 속삭임이 계속 들려 이바라는 은은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별 이상은 없다고 했고, 이 속삭임은 꽤나 끈질기게 잊어버릴만 하면 툭 던지듯 들려왔다.
그리고, 그 관찰들은.. 인정하기 싫지만 분명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그것도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보는 듯한 것들로만. 이바라는 다른 것보다 그게 제일 괴로웠다. 차라리 저주의 말이나 들려오는 환청이었다면 이 삶에 그게 뭐 하나 대수겠느냐며 넘겼을 텐데 애정어린 말이 들려온다는 건 꽤나 한숨 나오는 일이었다.
“당장 출발이라는 거네!!”
“아기씨, 카메라 들고 가셔야 함다-!”
화창한 날씨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히요리와 같이 분주해지는 쥰을 오프닝으로 에덴의 여행 버라이어티도 시작되었다. 자유여행 기록 형식으로, 보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고 싶었던 거겠지만... 이바라가 그렇게 놔 둘 리 없었다. 완벽하게 합을 맞춘 대본대로 각하와 전하가 움직여주고 계셨고 이바라는 틈틈이 카메라가 돌지 않는 사이에 업무를 쳐내며 바쁘게 그 스케줄에 어울려주고 있었다.
바쁘게 시장을 돌아다니고, 당고를 나눠먹고, 숙소를 돌아다니면서 다다미가 깔린 방에 즐거워하거나 온천이 딸린 숙소도 둘러보았다, 기대 가득한 눈으로 현재 총무를 맡고 있는 이바라를 바라봤지만 예산 부족으로 고개를 가로 젓자 잔뜩 시무룩해진 전하가 꺼내든 개인 카드를 말리는 일도 있었다. 적당한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과정은 즐겁기도 했고, 꽤 유쾌했다고 생각한다.
‘머릿결이 반짝반짝해’
숙소를 잡아 짐을 다 내려놓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그 지역을 즐기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 시원하게 발을 담그고 놀 만한 계곡이 있다고 안내를 받자 쥰은 그런 데는 과일을 사 가야 한다며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수박을 들고 가고 싶어한 히요리와 저거 무거워서 못 들고 다님다..! 하던 쥰의 가벼운 실랑이는 자기가 들 수 있다며 손을 내민 나기사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바라는 열심히 예산을 분배하느라 골머리를 썼고, 히요리는 툭하면 개인 카드를 써 버리려고 했다. 그 중 몇 번은 이바라 몰래 성공하기도 했다.
넷이 슈퍼를 나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계곡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팬을 만나 기분 좋게 사진도 찍어주고, 사인도 해 주면서 인기를 실감하기도 했다. 인터넷상에 에덴 지금 어디어디서 촬영중이란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에 그들은 역시 슈퍼스타는 어딜가나 주목받아 어쩔 수 없다는 거네-!! 하며 웃는 히요리와 함께 뛰어서 계곡으로 향했다.
‘눈동자가 여름 하늘 같아’
셀프캠에 익숙하지 않은 나기사가 자꾸만 땅바닥을 찍는 일도 있어 스텝들이 어렵다면 차라리 얼굴을 크게! 라며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이라면, 내 얼굴보다는 이 아름답고 즐거운 풍경을 다같이 즐길 수 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는 나기사에게 히요리는 살짝 귓띔해주었다. 나기사군은, 얼굴이 절경이라서 그래.
바쁘게 업무연락 하느라 도통 계곡에 들어오지 않으려 하는 이바라를 나기사가 살짝 엄한 얼굴로 안아올리자 이바라는 노트북만은 살려달라며 빌었다. 이 와중에도 노트북이 먼저냐고 놀리는 쥰을 흘겨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각하, 제발! 그러자 조심스레 다시 땅에 내려주는 걸 히요리는 못마땅해 했다. 바다였다면 물에 던져버렸을 텐데! 하며 나기사에게 가세해서 이바라에게서 노트북을 빼앗으려 들었다. 당해낼 길 없는 이바라는 꼼짝없이 노트북을 빼앗기곤 물을 흠뻑 뒤집어썼다. 이래서 버라이어티는..! 버라이어티는...!!!
‘..목욕 당하는, 고양이?’
한바탕 계곡에서 정신없이 놀고 나서는 슈퍼에서 사 온 과일들을 깎아 먹었다. 차가운 계곡물에 한참을 담가 둔 과일들은 어떻게 먹어도 맛있는 별미 같았다. 슬슬 쌀쌀해지는 것 같다며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돌아가는 길에 저녁은 뭘 먹을까요- 고민했다. 아까 낚시라도 할 껄 그랬나요, 하는 쥰에게 지금 서바이벌 체험을 하는 게 아니라고 히요리가 질색했다.
나기사가 이 지역만의 무언가를 먹어보고 싶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넷은 쪼르르 이 지역의 유명한 라멘 집으로 향했다. 보통 이럴 땐 특산물을 활용한 걸 먹지 않슴까? 의문을 던지자 ...평소 먹어볼 수 없는 건 이런 거니까. 하고 나기사가 덧붙였다. 응응, 특산물 같은 건 돌아가서도 실컷 먹을 수 있네! 유명 맛집을 도는 게 더 좋아! 기운찬 히요리의 말에 쥰이 푹 한숨을 쉬었다. 아, 그런 거였음까...
잔뜩 물놀이 한 몸에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자 얼굴이 자연스레 말랑하게 풀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 와중에도 이바라가 건넨 엄격한 모드 대본에서 벗어나지 않은 나기사의 대단함에 쥰은 감탄했다. 너무 바보같이 웃지 말라고 방금 이바라에게 옆구리가 찔렸기 때문에.
‘젓가락질 하는 손이 쪼그매’
저녁도 배부르게 먹고, 디저트라며 일본 편의점에 들려 이것저것 신기한 것들을 사와서는 하나하나 까먹으며 가벼운 잡담 시간을 가졌다. 역시 다음에는 온천이 있었으면 좋겠네. 하루의 마무리가 따뜻한 온천욕이 아닌 여행이라니 있을 수 없다는 거네! 하는 히요리의 옆에서 그건 아기씨가 비싼 곳으로만 여행 다녔기 때문이라구요-? 하고 살짝 쥰이 비꼬았다. 살짝 나른한 얼굴로 셀프캠을 만지작거리며 오늘, 즐거웠을까? 하며 마무리 멘트를 착실하게 하는 나기사의 옆으로 히요리가 장난스레 같은 앵글로 달려들었다. 왁자지껄하게 다음날도 기대해달라며 캠을 마무리하고서야 이바라는 천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가끔은 정말 좋은 프로그램을 가져오네, 독사!”
“즐거우셨다니 무엇보다 뿌듯합니다. 전하! 다음에는 카메라 없이 편안하게 휴가를 즐기실 수 있도록 자신, 열심히 준비해 보겠습니다.”
“..나도, 즐거웠어. 고마워.”
부드럽게 미소짓는 나기사의 말에 이바라는 각하의 감사에 방송하는 것이니 굳이 감사를 표시하시지 않아도 된다고 하려다가, 그냥 편안하게 웃어보였다. 편안하게 풀어진 얼굴에 한 톤 낮게 편안해진 목소리이여서 이바라는 괜시리 돌아가고 있는 카메라는 없는지 한번 더 확인했다. 가볍게 유카타로 갈아입고 사진을 몇 장 남긴 뒤 애견호텔에서 보내준 메리의 영상을 다 같이 보며 즐거워했다.
이불을 바닥에 인원수에 맞게 깔고, 적당히 나란히 누웠다. 불이 탁, 꺼지고 나니 바깥의 풀벌레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고요하고, 조용했다. 가슴께가 간지러울 만큼, 완벽하게 여름이 와 닿았다. 이런 걸 즐거운 여름이라고 하는구나, 평화롭고.. 아무런, 걱정도 없는 한 때가 무더운 날씨와 어우러져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눈부신 태양 아래 아름답게 빛나지 않는 것이 없고, 모두 다 한껏 열기로 들뜨는 것만 같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래서 버라이어티는 싫었던 건데. 잠들지 못하는 시야에는 한가득 여름밤 별빛들이 쏟아져 내렸다.
‘즐거워’
잔잔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 속삭이는 소리도, 오늘 내내 끊이지 않고 들려왔지. 이바라는 작게 한숨을 쉬며 뒤척거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가,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나기사의 눈이 자신과 마주보고 있었다. 잠이 안 오시나요? 가볍게 컨디션 관리 차원에서 물어보았지만 그는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행복해’
나기사는 은은하게 웃어보이며 계속 이바라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자신에게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물어도 고개를 저어보일 뿐, 별 말은 없었다. 오늘 하루종일 돌아다니셔서 피곤하셨을 테니 얼른 주무시라는 말과 함께 내일 여행 일정도 잘 부탁드린다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 눈은 마주보고 있으면 꿰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 종일 무언가를 관찰하고, 호기심을 갖고 찬찬히 살펴보는 그 눈은, 사람을 향할 때도 예외가 없었기 때문에.
‘귀여워’
“...이바라.”
“네, 각하? 너무 잠이 오지 않으시면 숙면에 좋은 차 한잔이라도.”
“쓰다듬고 싶어.”
‘귀여워’
잔잔한 속삭임 사이로 나기사의 의중을 알 수 없는 요구가 뒤따랐다. 조심스럽게 부스럭대더니 이불 밑에서 손이 튀어나와 이바라의 머리를 살살 간질이듯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바라는 약간 어색하게 웃으며 손길을 살짝 피해 보았지만 나기사는 아랑곳 않고 이바라의 머리카락을 따라갔다. 귀여움을 받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종종 머리를 쓰다듬는 나기사의 손길까지 아주 싫은 것은 아니었다. 크게 머리를 덮는 손이 가만가만 소중하게 어루만지듯 쓸어내리는 것은 아주 간지럽고..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마치, 사랑받는 것 같은.
“..귀여워.”
여름밤에 홀려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드럽게 미소짓는 얼굴에 밝은 달빛이 내려앉아 있었고 그 얼굴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올곧은 시선 끝에는 어색하게 쓰다듬을 받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속삭임과 나기사의 목소리는 점점 구분이 가지 않았다. 보다 선명하게 들려오기도 하고 여전히 간질이듯 속삭이기도 했지만, 모두 나기사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어쩌면 처음부터, 아주 처음부터 들었던 그 속삭임도 나기사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애정이 가득 담겨 있던 그 말들이 혹시, 어쩌면. 내가 미친 걸까, 이토록 완벽한 여름에 홀려서. 이바라는 스스로 얼굴이 화끈해짐을 느껴 나기사의 손을 피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작게 아쉬운 듯 탄성을 내는 나기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차마 지금 얼굴을 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얼굴 보고 싶은데.”
고요한 숙소 안은 풀벌레의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 색색거리는 깊게 잠이 든 숨소리... 그런 것들로 차 있었다. 행여 히요리나 쥰이 깰까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나기사의 목소리는 낮고, 울림이 강하게 다가왔다.
지금 이바라의 안에는 가설이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자신이 과로든 뭐든 건강상의 이유로 환청을 듣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불쾌한, 감히 나기사에게 애정과 관찰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이게 무슨 슈가슈*룬 뭐시기도 아닌데 각하의 속마음이 들리는 경우. 두 번째?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첫 번째는 스스로 이성적으로 아무리 받아들이려 해도 이해가 안 됐다. 스스로를 이성적으로,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데 무의식이 이렇게 뒷통수를 쳐? 싶어 열이 뻗치다 보면 두 번째일 수도 있지. 하하! 가뜩이나 알기 힘들던 각하의 속마음 듣기! 오히려 해피엔딩 아니냐? 하는 현실도피나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왜 갑자기 부끄러워졌어?”
나기사가 다가가서 살짝 이불을 잡아 끌어내렸다. 이바라는 별 다른 저항 없이 이불을 내주었고, 결국 또 다시 그 얼굴을 마주보게 되었다. 눈물 나겠다, 눈물 나겠어... 이바라의 속이 시끄러운 것도 모른 채로 그는 은은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사람 한 속은 모른다고 했지만 여태껏 그 속을 어떻게든 들여다보고, 원하는 것과 취할 것을 저울질하게 만들어 상황을 이끌어왔는데, 도저히.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 속을 알고 싶다고, 당연히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뭘 원하고 있는지. 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욕망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궁금해 했다고는 하지만-
“.....이바라는 오늘 즐거웠어?”
대답을 바라는 그 눈을 마주치면, 그는 무력해지곤 했다. ...즐겁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버리이어티는 질색이라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살짝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지만 나기사는 도통 마주친 시선을 피하는 것을 허락하질 않았다. 다시 눈을 맞춰오며, 조금 더 다가와서는 더 알려달라는 듯이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한다. 내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꿰뚫리는 느낌을 고스란히 견디며 그 눈을 마주해야만 했다. 애초에 언변으로 사람을 휘어잡는 것이 특기여서 말이 많은 성격인 것도 있겠지만, 지금은 뭐랄까.. 저 눈 앞에서는, 하나하나 모든 죄와 감상을 고해하듯 털어놓고 싶어지는 것이다. 감히 헤아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신 앞에서 그러하듯이.
“...여행은, 좋아하는 편이야?”
“예? 아아... 여가시간을 즐기는 방법에 대해 여쭤보시는 거라면 자신은 굳이 그런 시간을 통해 얻어지는,”
“....쉬잇, 조용히. 히요리 군이 깨겠어.”
말이 길어지자 나기사는 쉬잇, 하며 이바라를 진정시켰다. 이바라가 도르륵, 큰 눈동자를 굴리는 게 아마도 나기사의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눈치를 보는 중인 것 같았다. 말소리를 차분히 죽이고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 말고는, ...여행은 가 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하고 작게 대답했다. 기호가 있을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말이었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걷어낸 이바라는 꽤 솔직하고 가감없어서, 그런 점이 나기사는 재미있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번 방송 촬영은 꽤 즐거웠기 때문에, 같이 즐거웠으면 했는데.
“귀여워.”
“..아까부터, 계속..”
이바라는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슈가*가룬이든 초능력이든 자신의 환청이든 이 속삭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랬다. 나기사를 마주한 채로, 그의 목소리로 듣는 속삭임은 마치 형벌 같았다. 차라리 저주를 하라고. 속으로 말한 이바라는 진짜 당장에라도 울고 싶을 정도였다. 고요한 여름밤에 나즈막히 말을 거는 나기사와, 그 낮고 울림있는 목소리가 속삭이는 애정어린 말. 나기사와 마주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속삭임은 더더욱 자주, 선명하게 귀로 파고들어 들려왔다.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데시벨로. 이제는 정말 어떤 게 각하의 진짜 목소리고 어떤 것이 환청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랑스러워, 귀여워, 아기 같아, 솔직해, 눈동자가 큰 편이네, 고양이 같아, 볼이 말랑말랑 해 보여, 머리카락이 기분 좋아, 작은 다람쥐 같아, 토끼 같이 부드러워... 이바라는 귀를 틀어막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스트레스로 정말 병이 생기고야 말 것 같았다. 이 놈의 여름, 끔찍한 여름!
여름은 싫었다! 열기에 들뜨는 것도, 사람을 비이성적으로 만드는 더위도, 쉬지 않고 틀어야 하는 에어컨의 소음도, 짜증이 나 있는 사람들도, 길 전체에 깔리는 듯한 땀 냄새도, 전부 다 싫었다. 이제 싫은 이유를 하나 더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최악의 날이다. 오늘은, 최악의 날이 될 것 같았다. 슬슬 무서워 지기도 하고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언가에 휩쓸려 버리는 감각이 아주 불쾌했다. 이바라는 천천히 웅크려 고개를 푹 무릎 사이로 묻었다. 나기사가 의아한 듯 고개를 숙이는 이바라의 시선을 쫒았지만 아예 그는 꽉 눈을 감아버렸다. 숨 쉬는 것도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애정어린 말들을 피할수도 없이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이바라는 그런 것에 전혀 면역이 없었다. 아아, 젠장. 이를 악물고 귀를 막아도 속삭임은 계속 흘러들어왔다. 너를 향한 애정을 피하지 말라는 듯이, 제대로 마주하라는 듯.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푹 숙인 고개 위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이바라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마 평소대로라면 이런 질문은 하지 않았을 텐데, 물 속에서 겨우내 숨을 토해내는 것 처럼 말을 건넸다.
“...각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질문을 던진 순간, 모든 속삭임이 꿈처럼 확, 사그라들었다. 다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걸 물어볼 줄 몰랐다는 듯이 나기사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이 수 초가, 마치 두시간은 되는 것 같았다. 대답을 기다라는 동안 가라앉은 정적이 죽을 것 처럼 어색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할까, 하고 탐구하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 편안하게 호선을 긋기 시작했다.
“...이바라 생각을 하고 있어.”
계속, 이바라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나기사는 못이라도 박듯 한번 더 말해주었다.
“...이번 촬영, 즐거워서.. 이바라도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눈동자가 하늘이랑 같은 색깔이여서 예쁘다고도 생각하고.. 햇빛을 받은 머리카락이 반짝거리는 것도.”
말을 이어가던 나기사는 싱긋, 웃어보이며 이바라의 손을 잡았다.
“..손이 정말 작고, 귀엽다고 생각해. 이런 손으로 열심히 기획서를 만들어 오는 것도, 그래서 더 하나하나 소중해. 날 궁금해 하는 얼굴이 재미있어. 눈치보는 얼굴은 토끼 같고 밥을 먹을 때는 다람쥐 같고, 평소에는 고양이 같아.”
나기사는 즐거운 듯 웃으면서 놀란 듯이 굳어 있는 이바라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나, 이바라가 좋으니까.”
이바라는 그거 고백입니까, 설마. 하고 묻고 싶은 걸 겨우 삼켜냈다. 안 듣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몰라, 생각하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고 어색했다. 대답을 바라듯 여전히 이바라를 바라보고 있는 나기사에게 이바라는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저희는 이용하는 사이이므로 우호적인 관계일수록 좋다느니 저도 각하를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느니 사랑한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뱉을 수 있었을 텐데 도저히 그런 말로는 대답이 안 될 것 같은 예감에 이바라는 멍청하게, 아아..감사합니다. 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피어나는 꽃잎에 간질여지는 것 같은 감각이 온 몸을 휘감았다.
여름이, 그토록 싫던 여름이 마음 안에 가득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