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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summer,
love.

なぜか君と歩きたかった海辺。

20210718 나기이바 합작

Appassionata

w. 익명B

   오키나와의 바닷물은 차가웠다. 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해가 저물어버린 순간 바다가 식어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던 걸까? 나기사는 오른손을 둥글게 모아 들어 올렸다. 길고 유려한 그의 손가락 사이로 바닷물이 조금씩 도망쳤다. 나기사는 물을 담은 손바닥이 본래 제 무게를 되찾을 때까지 그 광경을 소리 없이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돌려 눈앞의 바다를 마주했다. 허리춤까지 차오른 파도가 쉴 새 없이 움직였으나, 나기사는 마치 나무 탁자라도 되는 것처럼 물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파도가 손끝에서 부서져 포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동안 그는 오키나와의 밤바다를 연주하는, 그 기이하고 예술적인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나기사의 손이 멈춘 것은 그의 왼쪽 새끼손가락이 잘못된 음을 짚었을 때였다. 철썩이는 소리를 제외하고 밤은 조용했으나, 만약 그가 치는 것이 바다가 아닌 피아노였다면 끔찍한 불협화음이 귀를 강타했으리란 사실을 나기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연습했던 곡이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바다를 찾아온 것은, 언제나 나는 그 불협화음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한 사람을 떠올렸다.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줏빛 머리칼이 그의 상상 속에서 흩날린다. 나기사는 감은 눈 속에 비친 환상을 보며 들리지 않는 연주를 계속했다. 건반이 출렁인다. 진녹색 테의 안경 너머로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가 비친다. 그 눈은 어떤 감정을 담고 있지? 오키나와는 밤이기에 바다는 온통 흑건뿐이었다. 피아노 아래 잠긴 다리가 추웠다.
   그는 길고 긴 연주가 끝나고서도 상상 속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1. allegro agitato molto

   고개를 숙이자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인사를 마친 이바라는 무대를 내려오며 이층의 관객석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조금만 더러워져도 신경이 쓰이기에 안경을 벗고 나왔지만,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낯익은 회색 머리칼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수고했다며 말을 건네는 사람들을 제치고 이바라는 아무도 없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드디어 왔구나, 이바라."

   강당의 문을 열었을 때 관객석에는 나기사 한 사람뿐이었다. 빼곡히 들어차 있던 다른 관객도, 다음 차례로 나올 연주자도 없었다. 강당의 문이 닫혔고 이바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나기사는 머리를 묶어 왼쪽 어깨로 내렸다. 콩쿠르에 나갈 때 늘 묶던 방식이었다. 정작 콩쿠르에 출전한 사람은 난데.

   "각하."

   이바라는 그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제 연주를 들으러 와 주시니 참으로 감동입니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작열하는 태양 같은 주홍빛 눈이, 소리 없이 줄곧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바라는 간혹 생기는 그의 침묵 앞에서 쉽게 두려움을 느꼈다. 목울대가 굴렀다.

   "나는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을 거야."

   왜? 그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바라는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의 행동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강당이었던 공간이 온통 시꺼먼 어둠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실제로 어두워진 건 아닐 것이다. 눈앞의 그는 빛이라도 나는 듯 선명하게 보였으니.


   나기사가 다시 입을 열어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바라는 떨어졌던 고개를 들며 정신을 차렸다.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턱을 괴고 잠들어 눌린 왼쪽 뺨을 문지르며, 이바라는 창문 가리개를 열어 바깥을 살펴보았다. 에메랄드빛 바다라는 말은 자주 들어봤지만, 실제로 이렇게나 푸른 바다를 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바라는 잠시 창문 너머의 풍경을 뚫어져라 감상했다.
   곧 이바라는 가까워지는 섬에서 눈을 돌리고 뻐근해진 어깨를 주물렀다. 시간은 어느새 여섯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여름이 한창이다 보니 여전히 한낮처럼 밝았다. 목적지까지는 공항에 내려서 삼십 분 정도 차를 몰고 가야 했다. 운전면허를 빨리 취득해놓아 다행이었다. 초심자인 데다 운전 경험이 몇 번 없어 조금은 걱정도 되었지만, 도보와 대중교통에 의지하는 것보단 나을 테다. 이바라는 스마트폰을 꺼내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오키나와현 나카가미군 니시하라정 가네구 263

   주소를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저를 보던 히요리 전하의 표정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 그 표정. 자신 못지않게 자존심은 높아서, 제게는 언제나 째려보던 눈빛뿐이던 그답지 않았다. 전하는 언제나 내가 각하의 인생을 망쳐 놓았다고 생각했으니까, 각하에 관해 묻는 내겐 아무것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지만, 별로 그의 생각 따위를 알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어느새 검은 화면 위로 자신의 얼굴만 비추고 있는 스마트폰을 메신저 백에 넣고, 이바라는 안경닦이를 꺼내 조금 뿌예진 안경을 닦았다. 비행기는 어느새 활주로를 달리고 있었다. 또렷해진 시야 속에 오키나와의 태양이 눈부시게 들어왔다. 석양이 질 즈음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태양이 머무는 곳에.

 

   여러 채의 주택이 따개비처럼 붙어있는 주택단지였다. 이바라는 35호 주택의 문 앞에 다다라서도 다시 한 번 주소를 확인했다. 자전거 한 대가 주차장 한편에 기대어 있었다. 초인종을 누른 이바라는 잠깐 그 자전거를 쳐다보았다. 문이 벌컥 열린 건 그때였다. 예고 없이 찾아온 자신이었던 터라 집에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이바라가 깜짝 놀라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 미안. 내가 놀라게 했어?"
   "아닙니다."
   "정말 오랜만이네, 이바라. 서 있지 말고 어서 들어와."

   허리께까지 자란 회색 머리카락이 뒤를 도는 그를 따라 하늘거렸다. 이바라는 뒤를 따라 현관으로 발을 들였다. 전형적인 형태의 주택이었지만 곳곳에 그의 취향이 묻어났다. 가령 고동색 가죽으로 만든 소파나, 이상한 물건들이 진열된 거실 벽의 선반같이. 물론 이상하다는 건 제 기준이고, 그는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찾았기에 자랑스럽게 전시해둔 걸 테다. 그의 안내에 따라 소파에 앉은 이바라가 눈을 움직여 거실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사이, 그는 티백으로 끓인 녹차 두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이바라."
   "감사합니다, 각하."
   "후후. 갑자기 올 줄은 몰랐지만, 이런 깜짝 이벤트는 즐겁네. 이바라를 만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니까, 나도 모르게 들뜨게 되는걸."

   그게 말없이 반년을 잠적해 있던 인간이 할 말입니까? 이바라는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켰다. 물론 상상 속에서야 만나면 뺨을 한 대 갈겨주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적어도 화풀이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럴 수는 없었다. 고작 불평불만을 토하기 위해 온 게 아니니까. 목표는 이 인간을 다시 도쿄로 데려가는 거였다. 그러려면 최대한 호의적으로 굴어서, 같이 돌아가도록 꼬드겨야지. 이바라는 뜨거운 녹차 한 모금을 삼켜 제 혓바닥을 예열했다.

   "이거, 이거! 저 또한 각하를 뵙는 게 너무도 오랜만인지라, 감정이 환희로 요동치는 것을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군요! 각하를 만나 뵙게 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각하의 존안을 마주하고 나니 기억이 새하얗게 날아가 버릴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이바라, 눈에 독기가 있는데. 화나는 일이라도 있어?"
   "물론 각하께서 제게는 행선지를 말씀하지 않으신 채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은거하고 계셨던 점은 마음이 조금 상합니다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잠시 묻어두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오늘 같은 경사스러운 재회의 날에는 역시 그간의 회포를 푸는 것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이바라는 본심을 숨기려 할 때 말이 길어지지?"

   이 지독한 핑퐁 게임에서 진 사람은 결국 이바라였다. 그는 이따금 공격성 없는 얼굴을 띠고 허점을 찌르는 경향이 있었다. 이바라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앞에 앉은 나기사의 표정이 이전보다 조금 식어 있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대체 왜 말도 없이 숨어 계셨습니까?"
   "말도 없이? 하지만 이바라, 나는 그때 네게 이야기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조만간 도쿄 밖으로 이사할 거라고."
   "아아, 그거요.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겠다는 말씀도 하셨죠, 분명. 그게 충분한 답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애초에 이 일본에서 도쿄 밖에 해당하는 지역이 얼마나 넓은지 인지는 하고 계시는지요?"
   "정확한 주소지를 이야기하지 않아서 불만이었던 거야? 미안해, 그땐 구체적인 이사 장소가 정해지지 않았어."

   반대로 이바라의 감정은 점점 더 끓어올랐다. 남은 녹차를 그 반반한 얼굴에 끼얹고 납치라도 해서 도쿄로 끌고 가고 싶었다. 예상은 했지마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저 천진한 태도를 보니 화가 치밀었다. 누구는 당신한테 인생을 투자해서 지금 이 꼴인데, 정작 당신이란 사람은 즐겁다는 듯이 오랜만이라고나 하고. 하지만 사에구사 이바라는 만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비록 고등학생의 신분이라도 사업에서는, 특히 교섭은 따라올 자가 없는 분야가 아니던가. 란 나기사는 제게 확실히 예측불허의 변수였지만, 이대로 휘둘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이바라는 화제를 돌렸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셨을 텐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괜찮아. 놀라긴 했지만, 분명 기쁨에서 비롯한 반응이었으니까."
   "그런가요. 아, 혹시 이후에 일정이 있으신 건 아니신지요? 대학에 다니신다고 전하께 들었는데."
   "히요리가…. 그렇구나. 대학은 이미 학기가 끝났고, 오늘은 어디 나갈 생각도 없었으니까. 이바라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네."

 

   느긋하게라고는 하지만 바깥은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곱 시가 넘어간 듯했다. 더 늦기 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좋겠군. 이바라는 어느새 비어버린 찻잔을 손안에서 굴리다 말을 꺼냈다.

 

   "저녁은 드셨는지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식사라도 하며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시겠습니까? 물론 제가 사겠습니다."
   "그럴까. 이바라와의 식사도 정말 오랜만인걸."

   도착한 곳은 집 근처의 작은 이탈리안 비스트로였다. 이바라는 천 엔이 조금 안 되는 제노베제 바질 파스타를 씹어 삼키며 즐거워 보이는 나기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제는 자전거도 잘 탈 수 있게 되어서, 등하교는 매일 자전거로 하고 있고. 후후, 기회가 된다면 이바라도 태워주고 싶네. 비록 집에 있는 건 일인용이라 나 혼자밖에는 탈 수 없지만 말이야. 아니면 각자 자전거를 마련해서 함께 경주하는 것도 재밌을지도…. 그러고 보니 이바라, 자전거는 탈 줄 알아?"
   "물론입니다, 각하! 저 또한 기회가 된다면 각하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영광스러운 경험을 얻고 싶군요. 이야, 아름다운 오키나와에서 각하와 자전거를 타는 그날이 벌써 기대가 됩니다."

   거짓말이다. 영광은 무슨, 이바라는 속이 타는 느낌에 잔에 담겨 있던 얼음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지역 특산이라며 추천받은 파스타는 맛있었지만, 그 파스타를 추천해준 사람이 신이 나서 그동안의 생활에 관해 조잘거리는 것을 듣자니 속이 배배 꼬이는 듯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피아노를 그만두겠다는 말 한 마디 하고서 반년을 오키나와에 도피해있던 사람이다.

 

   "미안,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지?"
   "아닙니다. 그동안 각하의 생활을 알 수 있어 제게는 참으로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이바라는 어떻게 지냈어? 학교는 잘 다니고 있지?"

 

   예, 누구 씨가 휴학원서도 자퇴원서도 전부 반려하라고 담임에게 미리 말해놓은 덕분에요. 세 번째로 자퇴원서를 제출할 때 담임이 제게 했던, 나기사 군도 자신이 학교를 계속 다니기를 바랄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이바라는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자퇴원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낮에는 적성에도 안 맞는 공부를 했고 밤에는 나기사의 흔적을 찾았다.
그리고 거듭 다짐했다. 각하고 뭐고 일단 만나면 뺨부터 한 대 때려야지. 란 나기사의 정갈한 얼굴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어릴 적부터 전쟁놀이를 하며 잔근육을 다져온 사에구사 이바라로서 그 말은 대단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보니 때릴 마음은 들지 않고, 고작 거친 언사로 분풀이하는 정도가 최선이겠다 싶다. 어차피 복귀가 결정되면 기사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얼굴이니, 깔끔하게 보존해두는 게 좋겠지.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 혹시 각하께서 저의 담임교사에게 제 휴학이나 자퇴를 만류하라고 요청하셨습니까? 슈에츠 학원에서 나오려 해도 뜻대로 되질 않아서 말이지요."
   "앗, 알고 있었구나. 이바라라면 나를 찾느라 학교생활을 소홀히 할 것 같아서. 나를 찾으러 와주는 건 기쁘겠지만, 역시 네가 나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다면 죄책감이 들고 네게 미안할 거야."
   "저는 그딴 거 바란 적 없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덕분에 주소지를 알고도 찾으러 오는 데 두 달이나 더 걸렸단 말입니다! 젠장, 올해 당신이 놓친 콩쿠르만 몇 개인지 아십니까? 당신이 날 강제로 슈에츠 학원에 남아있게 한 덕분에, 내 계획이 전부 엉망이 되어버렸다고!"

 

   말을 마친 이바라가 거칠어졌던 숨을 골랐다. 갑작스레 난 큰소리에 점원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것이 느껴졌다. 젠장, 또 왜 이렇게 된 거야. 늘 침착하고 냉정하다는 평을 듣는 그였지만, 란 나기사라는 인간 앞에서는 항상 이랬다. 계획은 전부 틀어지고, 앞서나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고.

 

   "이바라."
   "또 뭡니까."
   "내 부탁으로 널 곤란하게 만든 건 미안해. 하지만 난 내가 곁에 없어도 네가 즐거운 학교생활을 했으면 좋겠어. 이바라도 이제 고등학교 삼학년이잖아. 친구들과 더 많은 추억을 쌓고, 자신의 진로도 고민해봐. 콩쿠르에만 연연하지 말고…."
   "하! 제 진로는 각하를 보좌하는 매니저로 정해져 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각하께서 돌연 은퇴 선언을 하시기 전까지만 해도 제 앞날은 고민 한 점 없는 탄탄대로였단 말입니다. 애초에 절 그렇게나 걱정하신다면, 이런 장난은 그만두고 제 진로를 생각해서라도 피아니스트로 복귀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장난이 아니라, 제대로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야. 그렇게 말하니 슬프네. 내 진심이 이바라에게는 전혀 닿지 않았구나."

   이바라는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녹색으로 물든 숟가락과 포크를 가지런히 모아 접시 오른쪽에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체 왜 피아노를 그만두신다는 건지, 이유라도 제대로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라면, 저 또한 각하의 복귀를 포기하고 도쿄로 돌아가 학교생활을 지속할 테니까요."
   "후후, 이바라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모범적인 답안을 제시하고 싶어지는걸. 나, 이바라를 설득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예, 예. 부디 노력해주십시오. 저야말로 이번에는 각하가 도망치도록 놓아두지 않을 생각이니까 말입니다."

 

   쇠고기덮밥의 마지막 한 숟가락을 입 안에 넣은 나기사가 눈을 감고 그것을 느리게 우물거렸다. 깊은 생각에 잠길 때 그는 버릇처럼 눈을 감고는 했다. 이바라의 입가에 엷게 미소가 걸렸다. 비록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지만, 실수에서도 꼭 한두 가지는 이득을 얻어가는 게 바로 자신이었다. 설령 납득할 만한 답을 제시한다 해도, 빈손으로 순순히 돌아갈 줄 알고? 이대로 소모전을 지속하면 지속할수록 승리의 가능성이 이쪽으로 기운다는 사실을 이바라는 잘 알았다. 다시금 그를 쟁취할 생각에 이바라가 눈을 빛내던 그때, 감고 있던 눈을 뜬 나기사가 입을 열었다.

   "나, 피아노보다 더 좋아하는 게 생겼어. 그래서 피아노를 그만둔 거야."
   "어처구니가 없군요. 고심해서 내놓은 답변이 겨우 그것입니까? 대학에서 배운다는 인류학인지 사회학인지 때문에요?"
   "아니야. 인간사회학도 물론 재미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좋아하는 거야. 피아노보다도, 히요리 군보다도. 가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뭡니까? 다른 흥미 분야가 생긴 거라면, 피아니스트를 병행하며 공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설마 제가 위대하신 각하께 그 정도도 지원해드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셨습니까?"
   "이바라를 무시한 적은 없어.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비밀이지만, 내가 피아노를 계속하면 그쪽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해도 즐겁지 않았어."
   "정말이지, 때 아닌 사춘기라도 온 겁니까? 각하께서 보통 사람들과 다른 상식체계를 가지고 계신 줄은 알았습니다만, 이 정도로 순진하신 줄은 몰랐군요. 마치 갖고 놀던 장난감이 질렸다며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습니다."

 

   더 들을 것도 없네요, 이바라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직이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는 단단했고 힘이 실려 있었다. 계산대로 향하며 힐끗 쳐다본 나기사의 표정은 평온했다. 이바라는 언제나 그 초연함을 싫어했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계속 그렇게 무지하게 있다가 패배한 줄도 모르고 결국 제 손으로 떨어질, 가엾고 고귀한 사람. 아니. 나만의 신. 전쟁의 승리를 선포하듯 이바라는 그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절 설득하시려면 더 나은 답변을 준비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각하."

2. stringendo

   부모가 누구인지는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기억의 시작은 어느 성당에서 운영하는 복지시설이었다. 그곳에는 자신과 같은 종류의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고 미사를 드렸다. 부모가 없거나 버린, 홀로 태어난 아이들.
   아이들은 그곳을 집이라 불렀고, 어른들은 시설이라 불렀다.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다. 이바라는 솔직해지기를 어려워했고, 간혹 말이 지나쳐 또래를 울리거나 화나게 하는 일이 많았지만, 누구도 그를 배척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따뜻한 날들이었다. 그것은 이바라를 사랑했고, 이바라도 그곳을 사랑했다. 물론 재수 없는 유즈루는 조금 미웠다.
   시설을 떠나야 할 나이가 다가오며, 더 정확히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이바라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해야 했다. 좋아하는 것은 친구들과 하던 전쟁놀이, 그리고 성당에서 배운 피아노 연주였다. 오랜 고민 끝에 레이메이 학원을 택했다. 일전에 나갔던 지역 피아노 콩쿠르에서 받은, 그 뜨거운 조명과 박수를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레이메이 피아노과에 입학하고 치른 첫 연주평가에서, 사에구사 이바라는 학과 내 최하점을 기록했다.

   그건 이바라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는 꼴등이자 패배였다. 한 가지 위안을 꼽자면 공동 꼴찌인 학생이 한 명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도쿄의 예술 고등학교는 작은 지역 대회의 수준과 천지 차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았지만, 직접 부딪혀보고 나서야 벽의 높이가 실감 났다.
   하지만 이바라는 멈추지 않았다. 하기 싫은 일을 참고 하는 건 이바라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첫 평가 후 몇 달간 이바라는 늘 성당의 피아노 앞에서 밤을 새웠다. 각성제와 강장제를 몇 병씩 들이키며 연주법에 관한 서적과 영상을 반복해서 보았다. 건반이 손끝의 모양대로 닳아 반들거렸다.
   뼈를 깎는 그의 노력은 결국 그가 학년 석차 1위와 학과 석차 2위를 동시 석권하고서야 멈췄다. 막차 닫았던 신입생이 전 학년 일등을 차지했다는 소문은 타 학과 학생들과 교사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 첫 시험에서 함께 최하점을 받으며 친해진 사자나미 쥰은, 그의 모습에 자극을 받았다며 덩달아 열정을 불태우더니 기어코 특대생 자리까지 따냈다. 이바라도 쥰의 성장을 제 일처럼 기뻐하며 장난스럽게 칭찬하고는 했다.

   그러나 질주는 거기까지였다. 이바라의 등수는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일학년 생활이 끝나는 날까지 그는 전교 이등을 유지했는데, 이바라는 그것이 못내 분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스스로 한계점에 다다랐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는데, 여기서 더 잠을 줄여서 피아노를 치다가는 손가락이 나가든지 정신이 나가든지 둘 중 하나는 실현될 것 같았다. 그렇게 이바라는 인생의 두 번째 벽을 경험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자신이 정복해야 할 또 하나의 고지가 생겼다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절대로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나니 마음 저편에서 시기심이 치솟아 올랐다. 대체 어떤 인간인지, 그놈 얼굴이나 한번 보자. 그런 심정으로 그가 정기적으로 참여한다는 자선 음악회에 갔을 때, 이바라는 회색 머리를 한쪽으로 묶어 늘어뜨린 소년이 기가 막히는 실력으로 징글벨을 연주하는 장면을 목도하고야 말았다.
   이바라는 그 재수 없는 인간을 눈앞에서 절대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하하하하하!"
   "비웃지 마세요! 정말이지, 쥰은 가끔 자각 없이 남을 상처 주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버릇은 하루빨리 고치는 게 좋을 겁니다."
   "하하, 비웃은 게 아니라고요. 그냥 당신도 정말 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만날 때마다 오키나와, 오키나와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정말로 갔잖습니까. 뭐, 당신이 집요하다는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요."
   "제가 언제 노래를 불렀다는 겁니까. 그건 이번 여름방학에 오키나와에 갈 것이라는 예정 사항을 말한 거고요."
   "네, 네. 이바라도 정말 말이 많다니까요. 최근엔 아기씨도 잔소리가 늘었는데 말이죠. 아아, 이쪽이나 저쪽이나 귀찮은 사람 투성이. 그래도 이바라는 아기씨처럼 걸핏하면 절 찾아오지는 않으니 다행이네요."

 

   아기씨는 쥰이 히요리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레이메이를 졸업하고 예대에 입학해서도 자주 그를 찾아와 레슨을 봐주는 것 같았다. 이바라는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칼을 가볍게 털며 침대에 앉았다. 매니지먼트로 전공을 옮기기 위해 레이메이를 떠난 이후에도, 쥰은 종종 제게 연락해 자신의 근황을 들려주었다. 내용은 언제나 별거 없었지만 소소한 잡담이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오키나와 구경은 잘했습니까? 해산물 요리도 먹었나요? 저도 데려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방학인데 바닷가도 못 가고 레슨실에서 피아노나 쳐야 한다니…."
   "다시 말하지만 쥰, 전 오키나와에 놀러 온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각하를 설득해서 피아니스트로 정식 복귀시키기 위한 일이란 말입니다. 바닷가에도 안 갔고 해산물 요리도 안 먹었어요."
   "알아요. 그래도 기왕 멀리까지 간 김에 휴가 삼아 쉬다 오면 좋잖아요? 이바라는 쇠고집이니까, 분명 나기 선배가 넘어오기 전까지는 오키나와에서 여름을 보낼 생각이죠? 그렇다면 쉬엄쉬엄, 제 몫까지 놀면서 있어 달라고요."
   "쥰에게는 못 당해내겠네요. 그 말대로입니다. 게다가 각하께서도 쉽게 마음을 바꾸지 않으셔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머물게 생겼어요. 왜 피아노를 하기 싫은지 제대로 말씀도 안 해주시고, 정말이지 각하는 알다가도 모를 분이라니까요. 들어보세요,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저녁때 있었던 일을 떠올린 이바라가 침대 위로 엎드리며 나기사에 대한 불평을 쥰에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하다 보니 감정이 점차 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피아노를 그만두고 사라져서 미안하단 말은 한마디도 없고, 오랜만에 얼굴 보니 반갑다?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피아노를 왜 관두겠다는지 물었더니, 뭐라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재미없어져서랍니다. 어린애도 아니고, 고작 그런 이유로! 마지막 말은 거의 분노를 담은 외침에 가까워서, 이바라는 저도 모르게 두 발로 매트리스를 팡 찼다.

   "저기, 알겠으니까 진정 좀 해요. 벌써 자정이 넘었다고요. 옆집에 민폐 아닙니까? 아, 물론 이바라는 호텔에서 묵으니 옆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요."
   "이거 실례. 제가 워낙에 성량이 좋은 데다, 오늘은 짜증나는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본의 아니게 쥰의 귀에도 민폐를 끼쳤군요. 미안합니다! 피아니스트의 귀가 얼마나 중요한 기관인데, 아티스트를 전력으로 서포트해야 하는 제가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다니. 이것 참, 이 피해를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그러니까 진정하라니까요. 화가 많이 난 것도, 그럴 일이 있었단 것도 알겠으니까. 아까 전부터 묘하게 이쪽으로 독이 튀고 있는 느낌이거든요?"
   "독이라니요? 이제 쥰마저도 저를 독사로 여기시는 건가요? 아아, 히요리 전하께 미움 받는 건 익숙하지만, 쥰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아픕니다!"
   "젠장, 그 사람이 자꾸 옆에서 독사, 독사 거리니 옮은 것뿐이거든요. 이바라의 화가 가라앉은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텐션이 과하게 올라가 버렸잖습니까."

 

   스마트폰 너머의 쥰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바라는 잠깐 수화기를 귓가에서 뗀 채 몸을 돌려 침대 위에 정자세로 눕고 심호흡을 했다. 채 마르지 않은 자주색 머리카락이 흰 배게 위에 눌리며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 보니 쥰, 실기시험은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전하와 마찬가지로 예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건 아기씨가 멋대로 자기 학교에 오라고 성화를 부리니까…. 아무튼, 도쿄예술대학이면 음악 부문에서는 일본 최고의 학교니까 말이죠.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아기씨도 레슨을 봐줄 때마다 곡의 분위기를 전혀 못 살린다고 하거든요. 맞다, 저 지금 레슨실인데, 괜찮으면 이바라도 한 번 들어주지 않겠어요?"
   "이 시간까지 연습입니까? 쥰도 참 부지런하군요. 뭐, 좋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쥰의 연주를 듣고 싶기도 했거든요."
   "하긴, 이바라는 슈에츠로 편입하고 나서 콩쿠르에는 전혀 출전하지 않았으니, 서로의 연주를 듣는 일도 좀처럼 없었죠. 좋아, 의욕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간만에 들려주는 연주,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이바라는 조용히 눈을 감고 전파 너머로 들려오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1악장을 감상했다. 그의 연주는 확실히 예전보다 부드러워졌고 아름다웠다. 물론 히요리 전하라면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으시겠지만, 노력의 결과가 느껴지는군요. 형편없었던 당신이 이 정도의 성장을 이룩해 내다니 감격스럽습니다, 쥰.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는 부끄러운 말을 마음속으로만 되뇌며, 이바라는 입가에 작게 미소를 띠었다.

   꽝!
   피아노 건반이 강하게 눌리는 소리에 놀라 이바라는 흠칫하며 눈을 떴다. 안경을 끼고 있는 걸 보니 저도 모르는 새 잠이 든 것 같았다. 귓가에는 피아노 연주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바라는 낮은 심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기분이 불쾌했다. 연주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만 같았다. 이 밤중에 누가 이렇게 큰 소리로 피아노를 치는 거야, 시끄럽게. 이바라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문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이건 대체 무슨 곡이지? 어딘가 익숙한 멜로디, 격정적이면서 힘찬…. 그래, 마치 달리는 벼락처럼, 회전하는 태풍처럼. 방금 그 비유도 언젠가 했던 것 같은데. 모든 것에 기시감이 들었다. 거리의 풍경도,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다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다. 이바라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면서도, 이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는 곳에 다다르고 있다는 느낌만이 그를 지배했다. 그곳에 도착하면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리라. 모든 것이 끝나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곧 발걸음이 멈춰 섰다. 네 외벽이 모두 하얀 집이 모래사장 위에 홀로 우뚝 서 있었다. 피아노 소리는 가까이서 더 크게 들렸다. 조금 전부터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연주자가 이 안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바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공간이 전환되었다. 이제 눈앞에는 낡은 피아노 한 대만이 남아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사람도 없는데 연주는 더 시끄럽고 볼품없는 소리를 냈다. 어찌나 엉망인 소나타인지, 날카로운 송곳으로 뼈를 긁어내는 느낌이었다. 누렇게 때가 탄 상아 건반이 가만히 놓여 있었다. 이바라는 당장이라도 이 끔찍한 리사이틀을 멈추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피아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보이는 건반 하나를 아무거나 눌렀다.
   쾅!
   이번에는 더 큰 소리였고, 피아노 건반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바라가 피아노를 치는 바로 그 순간에 났는데, 소음이 귀를 강타하고 나서 여태껏 머리를 어지럽히던 그 연주가 멈췄다는 사실을 이바라는 뒤늦게야 알아챘다. 순식간에 공기가 차가워졌다. 한참을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이바라는 조용히 뒤를 돌았다. 온몸이 녹슨 양철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듯했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 너머로
   각하가….

 

   "헉!"

   이바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방금 눈앞으로 지나갔던 장면들이 현실처럼 생생해서, 전부 꿈이었음을 기뻐할 시간도 없었다. 아주 천천히, 그는 제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꿈속에서는 잊고 있었던 것들이 하나둘 기억나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들려오던 피아노 소리, 그건 란 나기사가 피아니스트로서 마지막으로 출전한 콩쿠르에서 연주한 곡이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연습곡 10번, 열정Appassionata.

   나기사는 한동안 그 곡만 연주하기를 고집한 적이 있었다. 그의 천재성과 자신의 서포트로 연전연승을 거두던 천재 신예 피아니스트가, 갑작스러운 왼손 부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던 단 한 번의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곡이었다. 트로피를 거머쥐지 못한 그 콩쿠르 이후로 모든 시험과 대회에서 그 한 곡만을 연주했다. 결과는 번번이 실패였다. 새끼손가락의 인대가 늘어난 이후로 그는 원래의 테크닉을 되찾지 못하고, 언제나 잘못된 건반을 누르고는 했다. 그럼에도 나기사는 마치 그 악곡이 꼭 완수해야 하는 과제라도 되는 것처럼, 거의 일 년가량을 그 곡에만 매진했다. 이바라와 히요리의 설득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졸업 전까지도 그 곡만을 연습했기 때문에, 이바라는 처음에 나기사의 은퇴가 초절기교 10번을 완벽히 연주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바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여섯 시 반은 기상하기에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런 꿈을 꾸고 나니 다시 잠들고 싶은 기분이 사라졌다. 생각해보면 하얗던 집은 어제 들렀던 나기사의 자택이었고, 제가 친 피아노는 어릴 적 성당에서 치던 낡은 피아노였다. 무의식이 제 기억들을 이것저것 조합해서 만든, 한마디로 개꿈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찜찜한 기분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처럼 목덜미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바라는 협탁 위에 벗어두었던 안경을 깨끗이 닦아 썼다.

   "쥰의 말대로, 쉬엄쉬엄 휴가라도 보내 볼까요."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바라는 발코니로 걸음을 옮겼다. 꿈은 현실의 반대라고 하던데, 맞는 말이든 아니든 그는 제 손에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괜한 허상에 겁먹어서 벌벌 떠는 건 어릴 적으로 족하다. 호텔 주변의 바닷가를 거닐며 산책이라도 해야지. 그리고 느긋하게 아침을 먹는 거다. 해는 이미 떠올라서 하늘이 어슴푸레했다. 창을 열어 쌀쌀한 바람을 두 뺨으로 맞았다. 그리고 이 바람이 여름을 데려가기 전에, 란 나기사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을 것이다.
 

3. accentato ed appassionato assai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으신다니요? 불초 사에구사 이바라, 이 미련한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이바라는 소리치듯이 물었다. 눈앞의 남자가 도대체 어떻게, 저런 평온한 표정을 하고 충격적인 말을 꺼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표정이 너무도 평화로워서 이바라는 더 조급해졌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또 얼마나 바보 같고 이상한 계획을 짜두었을까.

   "아아, 이것은 혹시 세간에서 유행하는 몰래카메라의 일종입니까? 그렇다면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각하, 아무리 그래도 저를 이렇게 놀라게 하는 장난은 삼가주시기…."
   "무슨 말이야, 이바라. 내 말을 제대로 듣기는 한 거냐?"
   "예?"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저 고압적인 말투는 원래 자신이 그에게 지시한 방식이었다. 미성년자에 신인이라고 얕보이지 않기 위해, 그리고 앞으로 있을 수많은 인터뷰들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도 처음에는 어색함과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최근에는 어쩐지 자신의 말을 잘 따라준다고 느꼈는데. 인형이 자아를 갖고 저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그를 제 것으로 포섭하기 위해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이바라는 그의 특이한 성격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보통 사람들보다 상식이나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는 건 물론이고, 생각이나 기분 또한 종잡을 수 없는 데다 말 또한 직설적이었다. 공격적으로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을 물어보더니 또 필요 없다고 하질 않나, 다짜고짜 제게 피아노를 시작한 이유를 묻질 않나. 그러다 마지막에는 결국 당연하다는 듯이 제 손을 맞잡았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어찌 되었든 상관은 없었지만.
   이바라는 제 인생에 나타난 두 번째 벽을 절대 넘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방향을 전환했다. 내가 넘지 못하면 아무도 넘을 수 없다. 란 나기사라는 천재를 제 손아귀에 쥐고, 세기의 피아니스트이자 독보적이고 유일한 예술가로 만들겠다. 그렇게 자신은 그를 독점하고, 그는 명예와 부를 거머쥐는, 이른바 공생을 시작하기로 했다. 누구도 넘지 못하는 벽으로 자신만의 성을 구축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소한 문제쯤은 얼마든지 지원해줄 의향이 있었다.
   종합 예술을 가르치는 레이메이 학원에서 클래식 아티스트를 전문으로 양성하는 슈에츠로 학교를 옮겼다. 피아노를 그만두고 클래식 매니지먼트 학과로 전입했다. 동시에 부티크 회사를 창설하고 경영진을 모집하며 천재 신예 피아니스트 란 나기사를 세간에 등장시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투자 유치를 위해 유즈루가 시종으로 일하고 있다는 재벌가를 찾아가 설득하고, 클래식 음악계의 유명인사지만 어째선지 나기사의 데뷔를 반대하는 그의 아버지와도 교섭했다. 그리고 기어코 그의 데뷔 리사이틀을 개최했다. 코즈믹 프로덕션이 내세우는 첫 아티스트이자 올해 열린 쇼팽 콩쿠르의 준우승자, 란 나기사!

   그러던 그가, 이제는 이바라에게서 떨어져 나가려고 한다. 영원히 견고할 줄 알았던 성벽이 한순간에 무너지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순간이 도래하리라고 예상은 했으나 잠시 방심하고 있던 이바라는, 적잖은 당황과 약간의 오싹함 속에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피아니스트, 은퇴한다니까. 네 회사에서도 퇴사할 거야. 위약금이라면 충분히 마련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나, 조만간 도쿄 밖으로 이사하려고. 새로운 삶을 살 거야."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입력되었는지 이바라는 과부하가 걸린 컴퓨터처럼 버벅댔다. 나기사가 그를 보고 당황하는 모습이 귀엽다며 웃어대기 전까지, 그는 안경이 코끝까지 흘러내리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이바라가 겨우 입을 열어 말을 끄집어냈다.

 

   "부상 때문이십니까?"
   "아니, 안타깝지만 그게 아니야. 손가락을 다친 건 꽤 예전이고 지금은 말끔하게 나았으니까. 뭐, 그날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곡은 아직도 실수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겨우 한 곡을 완벽히 연주할 수 없다고 해서 각하의 기량이 떨어졌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곡들은 완벽하게 연주하시고, 교사들도 각하의 연주에 관해 칭찬 일색이지 않습니까?"
   "맞아. 그러니까 이바라, 내가 피아노를 그만두는 건 단순히 슬럼프가 와서는 아니라는 뜻이야. 다시 말하자면 네가 더 이상 내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각하를 신경 쓰지 않는다니, 그런 일은 절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혹시 부족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부디, 이 자리에서 제 미련함에 대해 전부 말씀해주십시오. 저 사에구사 이바라, 각하를 위해서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개선할 수 있습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내가 널 얼마나, 아니. 내가 너를 미워할 리가 없잖아, 이바라. 나는 정말로 이바라를 사랑해. 이바라는 내게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빈말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여태껏 평온하기만 하던 나기사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이바라는 그의 눈빛에서 자신이 방금 '정답'에 근접했음을 직감했지만 그것이 무엇을 위한 정답인지, 여기서 어떻게 더 그를 흔들어 그의 결심을 되돌릴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이 끔찍하게 순수하고 무지한 사람은 종종 제 주변인들에게 사랑한다 말하고는 했는데, 이런 표정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은 제가 알기로 한 번도 없었다. 슬프고 두려운, 꽃병을 깨뜨려놓고 부모님의 꾸중을 기다리는 아이 같은 표정. 나기사는 그 표정을 잠시 갈무리하더니 슬픈 눈썹으로, 한 마디 말만을 남기고 등을 돌려 이바라에게서 떠났다.

   "그냥 받아들여, 이바라. 이게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그냥 받아들이라고? 그렇게는 못 하지, 이바라는 과거를 곱씹으며 제 기억 속의 나기사에게 되받아쳤다. 포기하는 건 이바라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악착같이 혹은 비열하게 굴어서라도 제 목표를 이루는 삶을 추구해왔다. 하지만 오늘의 경험으로 봤을 때, 이번 일은 다른 때보다 더 쉽지 않겠어. 이바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대로 그가 오키나와에 계속 살게 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키나와에 살더라도 공연을 위해 도쿄로 오게끔 만들어야 했다.
   이바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다시금 막막해졌다. 설마 그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그도 그럴 게, 어제저녁에 제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가? 더 나은 대답을 준비해두라고. 그러나 오늘 낮 다시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상한 돌덩이를 관찰하던 그는 제게 또 똑같은 말을 건넸다.

   "피아노를 그만두어서라도, 꼭 사랑하고 싶은 것이 생겼거든."
   "어제와 같은 답변이 아닙니까?"
   "응. 하지만 진심이야. 이것 말고 더 어떤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 말을 하던 나기사는 제 표정을 보더니 슬며시 미소를 띠고는 말을 덧붙였다.

   "알아, 나도 마음만 먹으면 다른 대답을 생각해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전부 거짓말일 테니까. 이바라에게는 어떤 거짓말도 하고 싶지 않아."
   "거짓말은 안 괜찮고, 이유를 숨기는 건 괜찮고요? 멋대로 잠적하는 것도 괜찮은 겁니까? 도대체 당신의 판단 기준이 뭡니까?"
   "화가 났네, 이바라. 진정해. 때가 되면 다 말할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째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기로 했는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때가 대체 언제입니까? 지금 제게 마냥 넋 놓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지만, 어차피 이유 같은 건 상관없잖아. 무슨 대답을 해도 이바라는 내게 새로운 답을 원할 거고, 그러다 내가 지쳐서 네 말에 따르겠다고 하기를 기다리고 있지. 그게 이바라의 계획 아니야?"

 

   솔직히 그때는 속마음을 들켰다는 생각에 잠시 긴장했다. 하지만 그가 하나를 알게 된 이상, 숨기는 건 무의미했다. 이번만큼은 제 블러핑도 허술했다는 뜻이겠지. 어찌 되었든 나기사와 저는 아티스트와 매니저로 일 년이 조금 모자라는 시간을 함께한 사이였다. 식습관부터 사소한 말버릇까지 서로에 관해 줄줄이 꿰고 있었다. 나기사가 저를 안다는 듯이 말할 때, 거짓말을 이어가면 그가 크게 화를 내고 토라진다는 것까지도.

   "역시 각하의 혜안은, 보잘것없는 제 의중까지도 완벽히 통찰해내시는군요. 각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는 각하의 심신을 지치게 만들어, 각하께서 무대로 돌아오시도록 설득하려 했었지요. 제 계획에 각하를 향한 배려가 부족하여 각하의 마음을 상처 입혔다면, 정말이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또 내게 거짓말을 하려는 거야, 이바라? 사실 전혀 죄송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지금도 이전과 같은 계획을 밀어붙이려고 하잖아."
   "피차일반 아닙니까, 서로에게 패를 숨기는 것은.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십시오. 제게 구체적인 이유를 계속 숨기실 생각이시라면 말입니다."

 

   나기사는 드물게 침묵을 했고, 손에 들고 있던 돋보기와 이름 모를 원석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방금까지도, 언제나 그의 앞에 서면 감정이 넘칠 듯 끓어오름을 느껴왔던 자신인데, 마치 처음 보는 이와의 교섭 현장에 와 있는 것처럼 차분하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어째서일까. 한 차례 숨을 들이쉬고 이바라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방금 제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말씀해주시지 않으시겠다면 저도 어쩔 수 없죠. 설득은 포기하겠습니다."
   "이바라…."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겠습니다. 각하께는 죄송하지만 아직 회사 측에서 계약 해지도, 활동 중단 선언도 하지 않았거든요. 이렇게 잠적해 계시는 건 엄연히 직무유기이자 의무 불이행입니다. 하지만 저도 각하께 폭력적인 수단은 별로 쓰고 싶지 않으니, 오늘 안으로 제가 납득할 수 있게 구체적인 사정을 말씀해주신다면 방금 그 발언은 재고해보도록 하죠. 그럼,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등을 돌려 집을 나오려고 했다. 겁을 주기야 했지만 실제로 제가 군 통수권자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인력은 당연히 없을 테니 우선 호텔로 돌아가 다음 계획을 세우려 했다. 나기사의 말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면.

 

   "이바라가 돌아가면."
   "예?"

 

   그래, 바로 이 부분이었다. 제가 조금 전부터 계속 과거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이유. 후회는 않지만, 다시 생각해도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다고 믿는 장면. 뒤돌아보지 않았다면, 반문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의 상처받은 눈과 조금 떨리는 목소리를 기억에 담지 않았다면. 들은 체 만 체 그대로 지나쳐왔다면, 저는 지금쯤 그의 답변을 기다리며 여유롭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바라가 내 복귀를 포기하고 도쿄로 돌아가면, 그때는 숨김없이 다 말할게."

   하필 그딴 말을 들어버려서! 이바라는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리도록 쥐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막상 그때는 감정이 차분해져 있어서 강하게 쏘아붙이지는 못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상했다. 말하자면 자퇴 후에 시험점수를 알려주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결국 전혀 알려줄 생각이 없음을 돌려 말하는 거다. 그렇게 비밀이 좋으면 여태 그런 것처럼 계속 말하지 않으면 될 것을, 굳이 포기하면 알려주겠다고 말하는 심보는 대체 뭔가?
   종교는 없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저를 지독히도 미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이름부터 가시밭길만 걸으라는 듯이 짓더니 레이메이 학원에서는 평가 점수 최하점을 주질 않나, 각하를 은퇴시켜버리질 않나. 그럴 때마다 이바라는 제힘으로 난관들을 차례차례 극복해왔다. 밤을 새워가며 노력해서 일등을 탈환하고 나기사의 거주지도 찾아냈다. 그런데 또 이따위 시련을 준다. 한 차원 높은 곳에서 보면, 제가 발악하는 모습이 재밌는 걸까. 쓸데없는 망상을 잠시 했다.

 

   쥰과의 통화를 끊고, 이바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연결했다. 어두워져 가던 화면이 희미하게 오 퍼센트라는 숫자를 띄웠다. 이바라는 화면이 다시 한 번 암전될 때까지 기다리다, 온통 까맣게 물들어버린 스마트폰을 보고서야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정적 속에서 한숨만이 새어 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한 탓이었다. 그중에서 무엇보다 저를 뒤흔드는 내용은, 방금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며 나기사가 했던 말이었다.

 

   "나, 피아노보다 더 좋아하는 게 생겼어."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문은 아니라고 했다. 피아노보다도, 히요리 전하보다도 좋아한다고 했으니 둘 다 아니다. 그럼 란 나기사의 인생에서 그 셋을 제외하고, 가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매니저로 열두 달을 한 사람만 따라다니면서, 그의 인생을 충분히 관찰했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그를 알고,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자만했다. 그런데 도무지 정답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원석이나 책일까? 그런 것들은 얼마든지 피아노와 병행할 수 있으니 아닐 테다. 오키나와로 이사한 걸 보면 자연이라거나? 그것도 땡, 각하는 이상하게 풍경에는 생각보다 감흥이 없으시단 말이지. 오히려 도시의 풍경을 보며 인류 문명의 발전을 감탄하는 거면 몰라도. 
   혹시 남들이 다 겪는 대학 생활이 부러워서, 피아니스트 활동보다는 대학생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히요리 전하와 같이 예대에 진학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겪어보지도 않은 삶을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는 없지.

   혹시 나는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바라는 잠시 안경을 벗고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린 뒤 제 뺨을 약하게 때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머리를 정돈하고 다시 안경을 걸쳤다.
   솔직하게, 그가 사랑한다는 것이 자신은 아닐까 고민해본 적이 있다. 각하는 평소에도 자신이나 히요리 전하에게 맥락 없이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많았으니까. 물론 그럴 때마다 제 옆에 있던 쥰에게도 사랑한다며 덧붙였지만, 그리고 그는 종종 세상의 모든 사람을 동등한 크기로 사랑하는 성자처럼 굴었지만. 자주 불러주는 만큼 또 함께하는 시간만큼 더 특별한 하나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이바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따라줄 텐데.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내가 안다면 스스로 인질이 되어서 내 말대로 하라고 협박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다. 그래서 그가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아님을 알았다. 나기사가 저를 사랑한다면, 곁에 남아있기 위해서라도 피아노를 그만둔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테니.

   오히려 제가 싫어서, 혹은 회사에 소속되는 것이 싫어서 떠났다고 하면 이해가 간다. 나기사는 가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 원점이다. 그렇게 이바라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도출해낸 결론 중,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추측은 이것이었다.
   각하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 상대가 각하께 피아노를 포기하라고 종용했다면?
   혹은 상대가 의미 없이 던진 농담이나 빈말을 나기사가 곡해했을 수도. 순진과 순정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 그의 성격을 생각할 때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추론이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이야기지만. 정말로 그래서라면 자신이 그 상대를 만나 설득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바라는 성공할 자신이 있었고 설득해본 경험도 여럿 있었다.
   그러니까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가장 이득을 보는 건 자신인데, 도대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헛헛함은 뭐란 말인가. 이바라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지금 잠들지 않으면 밤을 지새울 것 같았다.

   어제저녁에 느꼈던 헛헛함을 이바라는 지금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기사의 집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서부터였다. 배가 고파서 그런 줄 알고 어제 쥰이 말한 대로 해산물 요리도 먹고 있건만, 전혀 나아지지 않는 걸 보면 심리적인 문젠가 보다. 이런저런 생각들만 자꾸 나고, 밥은 든든히 먹어서 배는 부른데도 뭔가 빠뜨린 것처럼 허전했다. 하지만 감정적인 요인이라기에 이런 증상을 유발할 만한 일이 전혀 없지 않았는가? 애초에 이 느낌은 제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감정의 이름도 붙일 수 없는 종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쥰의 말대로 해산물 요리를 먹는 바보 같은 짓이나 하지 말 걸 그랬네요. 기분 나쁜 포만감이 덮쳐오기 전에 이바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동을 걸고 스마트폰을 확인하던 이바라가 작게 웃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이바라는 알림을 눌러 그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바라 물어볼 게 있는데요 방금 아기씨랑 얘기하다가 아기싯
   아기씨가 나기 선배 피아노 그만두고 이사 간 게 입

   성질이 급한 쥰답게 오타가 많은 메시지였다. 그러나 이바라의 시선을 끄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히요리 전하가, 각하의 은퇴 이유에 관해 말씀하셨다고? 제가 찾던 해답이 의외의 장소에서 나타난 것 같다. 드디어 각하의 그 영문 모를 고집을 꺾을 실마리를 찾아내었다는 기쁨에, 이바라는 바로 자판을 눌러 답장하려 했다. 그러나 제가 메시지를 다 작성하기도 전에, 쥰이 보낸 새 메시지가 먼저 도착했다.

   이바라 때문이라는데 이게 무슨 뜻이에요

 

   아아, 나의 유일신이.
   나를 지독히도 미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4. piu rinforzando

   "이바라가 내 복귀를 포기하고 도쿄로 돌아가면, 그때는 숨김없이 다 말할게."

 

   눈앞의 그가 뒤를 돌아보자 자줏빛 머리칼이 한 차례 흩날렸다. 그때, 나는 그를 잡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처음으로 보는 그의 표정에 당황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늘 곁에서 봐왔던 그 표정이 나를 향할 줄 예상치 못했던 거다. 너무나도 냉담해서, 마치 함께 지낸 시간을 전부 잊어버린 듯한. 그래서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더 날이 선 말이 나오리라는 것까지는 몰랐다.

   "각하께서는 저를 신뢰하지 않으시는군요."
   "이바라, 나는…."

 

   말문이 막혔다.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바라의 말이 맞지 않는가? 결국 먼저 신뢰 관계를 깬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끝까지,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겠다고 말한 이유를 숨기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바라는 알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버렸지만, 그 뒷모습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 나기사 군?"

   히요리의 불안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러나 나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려운 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티를 내면, 지금도 충분히 절 걱정해주는 히요리에게 더 많은 걱정만을 안겨줄 게 뻔했다.

 

   "물론 나야 독사가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잘 이야기해서 피아노 연주하는 것을 허락받았다고 들었네. 괜히 더 말을 얹었다가…."
   "하지만 히요리 군, 이번에는 내가 직접 아버지와 대면하고 싶어. 그때는 이바라의 도움만을 받았잖아. 나 스스로 의지를 표명하지 않으면, 아버지도 나를 이바라의 꼭두각시로 생각하실 거야. 그건 싫어. 나는 내가 원해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거라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거라고. 내 입으로 직접 아버지에게 말할 거야."
   "하지만 나기사 군의 아버지는 무서우신 분이잖아. 잘못해서 나기사 군이 다치거나 피아노 연주를 다시 금지당하면 어떡해?"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히요리 군. 아버지도 무섭기만 한 사람은 아니야."
   "그래도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네. 정말로 같이 가면 안 되는 거야?"

 

   나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소중한 히요리 군을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데려가고 싶지도 않았고, 제가 두려워하고 긴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혼자서 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몇 번 더 조르던 히요리는 나기사의 확고한 태도를 보더니 잔뜩 토라진 표정으로 말했다.

   "흥, 이래서 독사가 밉다는 거네! 나의 소중한 나기사 군을 빼앗아 가버리고 말이야. 정말 나쁜 히요리의 날!"
   "히요리 군, 나는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았어."
   "나기사 군은 모르네! 언젠가는 나기사 군도 성장할 거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때까지 내가 곁에서 하나하나 알려주고 싶었는데! 그 독사와 만난 후로 나기사 군은 독사한테만 의지하고!"
   "미안해. 그래도 이바라를 너무 미워하지 마."

 

   저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히요리도 이바라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나기사는 알았다. 본디 누군가를 쉽게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밝고 따뜻한 천성에 제가 자석처럼 이끌린 것이다. 히요리 군은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한 태양이었다.
   피아노를 알려준 것도 그였다. 아버지는 대대로 클래식 음악가 집안에서 자라 자신도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성공했지만, 자신의 인생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으니까. 지루한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히요리 군과 빠져나와 연회장 구석에 있던 피아노를 보기 전까지, 어떤 악기도 악보도 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건반을 눌렀을 때, 운명처럼 피아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히요리 군과 놀겠다는 핑계로 아버지 몰래 함께 피아노를 쳤다. 히요리는 언제나 자신을 따라와 줬고, 제 연주를 들어주고, 그가 훌륭한 플루티스트가 되면 꼭 자신과 함께 순회공연을 열겠다고 약속하고는 했다.

   그러니까, 나기사는 히요리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제게 히요리가 첫 친구였던 것처럼, 히요리에게도 제가 첫 친구였기에. 그리고 아주 깊은 비밀의 공유자이자 음악적 동료였기에. 그러나 언제까지 자신이 나아가려는 방향을 비밀로 해둘 수도 없고, 언제까지 히요리 군과 단둘이 피아노를 치던 어린 시절에 남아있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나기사의 인생은 이미 출발하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는 새 어디선가 나타난, 사에구사 이바라라는 조그만 눈덩이에 떠밀려.
   그리고 이제는 제 두 발로 삶을 걸어 나갈 차례였다.
   나기사는 아버지 앞에서 잠깐 심호흡을 했다. 여전히 긴장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느낌이 솟아났다. 설레는 걸까, 아니면 홀가분하다는 걸까? 나기사는 이 감정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앞으로 제 인생이 어떨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고 여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두려움에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가시밭길을 걸어 나가는 방법은 그 애가 알려준 것이다.

   "아버지. 나는 피아노를 계속 연주하고 싶어요. 그래서 졸업 후에도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려고 해요."

   그래. 이바라가 제게 알려준 것이다. 그 사파이어 같은 눈이, 가늘고 아름다운 손가락이, 느리게 페달을 밟는 검은 구두가, 여름 햇살에 반짝이던 안경이, 사랑스럽게 올라가 있던 입매가, 지그시 눌리던 건반이, 바람 속을 유영하던 슈만의 환상곡이. 그 한순간이 제 인생을 통째로 뒤집어놓았다. 그러니 이제 더는 원래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졸업과 동시에 피아노를 그만두게 하겠다며 아버지를 설득한 이바라의 거짓말에, 예전처럼 순응하며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증명할 거예요. 나와 당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내 음악과 당신의 음악이 다르다는 사실을. 내 삶 전부를 바쳐, 온 세상과 아버지의 마음에 음악이라는 빛을 밝히겠어요."

   설령 이다음이 낭떠러지라 해도, 나는 발을 내디뎌야 했다.

 

   바다를 찾아온 것은, 언제나 나는 그 불협화음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차례의 연주를 끝내고 나기사는 제자리에 서서 눈을 감았다. 상상 속의 주인공이 거짓말처럼 자신을 찾아와주면 좋을 텐데. 기왕이면 상상 속의 표정을 하고, 와서 함께 바다를 연주하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가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나기사는 너무도 잘 알았다.
   몸을 반대로 돌려 바다에서 나오니, 소금물에 젖었던 바지가 무거워지며 한기가 스며들었다. 이 추위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처음, 피아노를 치고 싶지만 불협을 피해 바다를 연주하러 왔을 때,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제가 목숨을 버리려는 줄 알고 다급히 뛰어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이고 지속하니 이제는 처 주민들에게 낯익은 별종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다만 한 가지 익숙해지지 않은 감각이 있다면, 그건 고양된 마음을 끌어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오늘은 더욱이 그랬다. 몇 번이고 연주를 지속하고 싶었다. 아침이 밝을 때까지, 이바라가 저를 찾아줄 때까지.

   이 이별은 아주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이다. 나기사는 단언컨대 자신이 살아가면서 이렇게까지 공들인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독립을 선포하고 피아노를 부수려는 그를 말리다 다친 손가락을 제때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 것마저도, 전부 이바라와의 작별을 위한 미필적 고의였다. 부상은 예상치 못했지만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가치가 사라지면 이바라는 나를 버릴 테니까.
   그가 자신을 따라올 수 없도록 교사들에게 부탁했다. 모범생이던 자신의 지위와 아버지의 명망을 이용해서. 비밀리에 일반 대학교의 입학을 준비했다. 아버지가 그렇게나 바라던 의사라도 될까 싶었지만, 역시 제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콩쿠르 성적은 나날이 떨어져만 갔다. 일부러 형편없이 연주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히요리를 제외한 그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하고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이바라에게 제 주소를 알려주었지만.
   히요리 군에게 처음으로 내 솔직한 마음과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을 때, 그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이해가 가질 않네, 나기사 군! 사랑이란 다 그런가? 지금 나기사 군은 내가 알던 나기사 군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네. 그가 대체 뭐라고, 그를 위해서 나기사 군의 인생 전부와 나마저도 버리려는 거야?"

   그의 말대로였다. 사랑이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하게 만든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 있겠는가? 먼저 떠나와 놓고 그리워하며, 다시 만났을 때는 아무렇지 않은 듯 굴었다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저린 심장을 부여잡고 다시 바다로 떠나는, 이런 미치광이 짓을.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설명할 방안이 없었다.
   이바라가 제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히요리를 찾아왔다고 그에게서 들었을 때, 그 어떤 대회보다도 심장이 떨렸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집 앞에 서 있을 것만 같았다. 만나면 어떤 말을 하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하게 될까? 기대가 오븐 속의 수플레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금방 사그라졌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상상하는 이바라의 표정을 나는 볼 수 없다.
   그는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으니까.

   나기사는 걸음을 떼었다. 이대로 젖은 채 하염없이 서 있다가는 감기에 걸릴 게 분명했다. 제 기분과는 별개로 해야 하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나기사는 잘 알았다. 그 운명적인 삶에 순종하는 법도 배웠다. 옷을 갈아입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지. 집은 오늘따라 유난히 멀었고 깊은 새벽에는 별들의 앙상블만이 들려왔다. 옮기는 걸음마다 물방울이 온음표 같은 점을 남겼다.
   아침이 밝고 집에 찾아올 손님을 떠올렸다. 나기사는 그 얼굴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이제 오키나와에 있고, 매일 자신을 찾아와주고, 불러내면 언제든 달려올 것을 알아도 계속 보고 싶은 그 사람을. 그 사람의 다양한 표정을 떠올렸다. 기쁨, 슬픔, 분노, 무기력, 즐거움, 놀람, 따뜻한 얼굴, 차가운 얼굴, 솔직한 얼굴, 거짓말을 하는 얼굴. 그리고 상상 속의 얼굴. 그 얼굴을, 그 표정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나기사는 자신이 사랑의 광신도라도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대로다. 그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다.

 

   관동지방 청소년음악대회 피아노 부문 대상, 사에구사 이바라.
   발표된 이름의 주인공은 무덤덤했다. 사실 그가 지을 수 있는 최선의 표정이었을 테다. 속으로는 분명 자신의 이름이 오르게 된 것에 불만을 토하고 있겠지. 나기사는 결과 발표 페이지를 닫는 이바라의 옆모습을 관찰했다.
   예기치 못한 부상을 안고 연주한 그 날의 대회는 엉망이었다. 제가 졸라서 못 이기는 척 출전한 이바라가 트로피를 거머쥔 것과는 달리, 나기사는 입상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신예였음에도 꽤 주목받았던 그였던지라, 란 나기사의 추락을 제기하는 기사가 몇 나왔지만 이바라는 발 빠르게 그의 부상 사실을 공개하고 성적 부진에 대해 해명했다. 하지만 나기사에게는 모든 것이 즐겁고 재미있게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본선에서 이바라가 선택한 자유곡이 슈만의 환상곡이었는걸.
   성격은 기계처럼 정교하고 딱딱한 그였지만, 이바라는 섬세한 묘사에 재능이 있었다. 본인은 잘 모르는 듯했지만 그의 연주는 늘 곡의 분위기나 셈여림이 확실히 살아있었다. 어쩌면 악상기호를 철두철미하게 지켜 연주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물론 나기사는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그야 악보 없이 한 번 듣고 바로 연주할 때도, 이바라만의 섬세함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나기사는 그에게 구태여 축하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자신의 축하를 받으면 그는 분명 겸손을 떨며 자신을 위로하려 할 것이다. 그보다는 말없이 저 옆모습을 오래 보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바라가 서는 다음 콩쿠르에는, 관객석에서 그의 연주를 느끼고 싶다고.

 

 

5. poco rallentando

   친애하는 사에구사 이바라.
   내 마지막 연주회에 너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바다의 소리를 들으러 와주세요.

 

   정갈한 필체는 익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이바라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카드를 들어 뒷면을 살폈지만, 세 문장을 빼면 카드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높임말에 이상하게 어우러진 '나'와 '너', 쓸데없이 고급스러운 카드의 재질까지. 틀림없었다. 이 초대장은 란 나기사가 제작한 것이다.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깜짝 이벤트를 너무 일찍 발견해버린 것 같다. 이바라는 초대장을 봉투에 넣은 뒤 복도로 나갔다.

 

   "각하, 어디 계십니까?"

   오늘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은 보란 듯이 열려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기사는 제게 이런 장난을 종종 쳤다. 대표적인 예시는 제 생일이었는데, 할 말이 있다며 방과 후에 아무도 없는 교실로 불러내서는 갑자기 탈출 게임을 시켰다. 그가 미리 남겨 둔 힌트를 따라 교실을 벗어나 어느 음악실에 들어가니, 히요리와 쥰과 함께 케이크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그가 있었다.

   그날과 완전히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자신의 집에 찾아오라며 어젯밤 보낸 메시지부터, 활짝 열려 있던 문과 이런 초청장까지. 하지만 오늘은 제 생일도 아니고, 이벤트를 할 만한 날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기사가 무엇을 준비했든 이바라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할 말이 뭔지, 어제 제가 말한 대로 답을 준비해왔는지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이바라는 눈에 보이는 방문을 열며 나기사를 불렀다. 분명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뒀으니 근처에 숨어있을 텐데.

 

   "각하? 여기도 안 계십니까? 대체 어디에 숨어계신 건지…."

 

   이바라는 비어있는 서재를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신이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서 급하게 숨었으리라고 예상했는데, 이걸로 이층에 있는 방은 모두 살펴봤으니 저택 내에 숨지는 않은 건가. 일층에는 거실과 창고뿐이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올라오며 보고 왔지만, 어디에도 그의 기척은 없었다. 자신이 방심하고 제대로 살펴보지 않아서 놓친 게 아니라면, 이미 집 밖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뜻인데. 느닷없이 나기사의 장난에 휘말리게 되어 아픈 골치를 꾹꾹 누르며 이바라는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가 카드를 집었다.

   바다의 소리를 들으러 와주세요.

   이게 무슨 소리람. 바다의 소리? 하여튼 그 사람의 엉뚱함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이바라는 실실 웃는 나기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을 이렇게 귀찮게 만들어놓고는, 마지막에 와서는 또 시답잖은 말을 할 게 분명했다. 아아, 만나면 물어볼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았는데 덕분에 전부 잊어버리게 생겼군요! 혼잣말을 입 모양으로 우물거렸다. 하지만 우선 이 바보 같은 연극에 어울려주어야 그를 만날 수라도 있겠지.

   이바라는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불도 켜지 않았던 방안으로 햇살이 쨍쨍히 내리쬐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별로 낭만적이지는 않은, 평범한 주택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작은 도로 너머 푸른 물의 군집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이바라는 미소를 지었다. 저 바다에도 이름이 있나? 잘은 모르겠지만, 이번 리사이틀의 개최 장소는 저곳이 틀림없겠지. 얼굴을 보고,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들어야만 하겠다. 내 곁을 떠난 이유를. 이바라는 군인 같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숨이 찼다. 이바라는 잠시 고개를 숙여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올해 여름은 예년보다 훨씬 덥다더니, 이글거리는 태양은 아직도 저 위에서 눈을 부릅뜨고 자줏빛 정수리를 달구는 중이었다.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바라는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적지 않은 관광객이 해변을 거닐고 있었지만 찾는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곳이 제가 가야 할 장소라고 생각해 찾아왔는데, 그 근처를 오랫동안 수색했지만 나기사는 없었다. 혹시 제가 있는 장소가 그 바다가 아닐 가능성을 생각해 해안선을 따라 꽤 멀리까지 가봤다. 바닷가에서 놀던 몇몇 꼬맹이들에게, 한밤중에 바닷속에 들어가 피아노 치는 동작을 하는 이상한 형에 관한 소문도 들었다. 그러나 오늘은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대답뿐, 그 이상의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가까이에 있는 바다를 몇 군데 더 찾아보았지만, 그는 거기에도 없었다. 애초에 이 섬에는 바다가 너무 많았다. 명소로 알려진 해변만 예닐곱 개는 나왔고, 외지인은 잘 모른다는 곳까지 합하면 수십 개는 될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모래사장에서 모래를 찾는 셈이었다.

   충분히 주변을 탐색한 이바라는 흐느적거리는 손부채질을 하며 해안가에서 벗어났다. 우선 숙소로 돌아가 나기사와 다시 한 번 연락을 취하고, 의심 가는 장소를 검색해볼 예정이었다. 애초에 '바다의 소리'라고 해서 꼭 바다일 필요는 없잖은가. 아쿠아리움일 수도 있고 수산시장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바라는, 자신의 목적지가 더 시원한 장소이길 바랐다.
   그러나 계속해서 바다를 찾아온 것은 정말이지 예감이었다. 바닷물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이곳저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더러는 그가 미쳐버린 줄 알고 더러는 몽유병 환자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이바라는 그 피아니스트가 나기사이며 온전한 정신으로 벌인 짓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심리까지는 종잡을 수 없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그렇게 사차원적이고 이상한 일을 벌이는 것은 그의 전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늘 바다에서 상상 연주를 지속해왔다면, 오늘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건 그렇고, 정말이지 녹아내릴 지경이로군요. 이바라는 조금 성난 목소리로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했다. 나기사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마음은 점점 불안해져 갔지만, 별개로 몸은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불쾌지수를 대폭 상승시켰다. 시원한 호텔 방을 상상하며 이바라는 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심장의 뜀박질도 함께 빨라졌고 땀방울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연이은 작전 실패로 인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이바라에게 어제 도착한 쥰의 메시지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후로도 몇 번 통화했으나 히요리는 묵묵부답, 쥰은 자기도 의미를 모르겠다며 제게 난제를 던져주고 갈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조차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불안해하던 찰나, 나기사의 메시지를 보고 그 내용에 관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바라는 고개를 저었다. 찜통더위에 뇌까지 녹아내리는지, 사고는 자꾸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제야 발이 멈춰있다는 것을 깨닫고 앞으로 내디뎠다. 언제나 그랬듯 답을 찾아낼 것이다. 당신이 모래가 되어 바닷속으로 사라지려 한다면, 나는 바다마저도 감싸 쥐는 가시덩굴이 되겠다. 그렇게라도 잡아내서 답을 듣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제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정말로 더위 때문일까? 얼룩진 안경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굳이 변명하자면, 호텔은 너무 멀었다. 그러나 속이려 해도 이바라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정신을 놓고 발이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나기사의 집이었다. 뭐, 상관없겠지. 이바라는 아직도 잠겨있지 않은 현관으로 들어가 제집마냥 에어컨을 켰다. 시원한 바람이 발그레 익은 얼굴을 금세 식혔다. 한참 그 앞에 서서 바람을 맞던 이바라는 위층으로 올라가 아침에 보았던 카드를 들고 내려왔다.
   분명 처음 나기사를 찾기 시작한 건 이른 아침이었는데 어느새 시각은 정오를 넘긴 상태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 헛수고만 했다니 정말이지 믿을 수 없었다. 혹시 몰라서 그의 집 안을 다시금 뒤져봤지만 역시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결국 원점이고 남은 건 이 초대장뿐인가, 이바라는 다시 한 번 찬찬히 카드에 쓰인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내 마지막 연주회에

   마지막. 이바라는 그 단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게 뭘까, 팔뚝을 타고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불안이 있었다. 설마 바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다 조류에 휩쓸린 건 아니겠지? 아니면 바다와 한 몸이 되고 싶다며 너무 깊이 들어갔다거나? 이바라는 자신이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기사의 생사를 의심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너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그 초대에 응해서, 이 연주회가 마지막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래, 나는 잘못이 없다. 바닷물 위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는 분명히 피아노 앞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함께 하던 모든 순간에 나기사가 얼마나 피아노를 사랑하고, 연주할 때 황홀한 표정을 짓는지 뻔히 보였다. 그러니까 나는 오히려 그에게 다시 행복을 가져다주려 했던 거다. 견딜 수 없는 고민이나 역경이 있어도 매니저로서 함께 공유하고 도우려 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또 나를 피해서.

   친애하는 사에구사 이바라.

   어쩌면 내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찾아온 이유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기 선배 피아노 그만두고 이사 간 게 이바라 때문이라는데. 쥰의 메시지를 잊을 수 없었다. 이바라 때문이라는데, 나 때문이라는데. 나는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어떤 부분에서 민폐를 끼치고 실수했기에?
   그러나 제가 단지 올바른 길로 걷고 있을 뿐인데, 올바르다고 여기는 길로 걷고 있을 뿐인데, 그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거라면. 함께 하던 매 순간 그가 불만을 참고 있었던 거라면. 나는 늘 나기사를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 그가 항상 내게 져주고 있었던 거라면. 그리고 내가 이제야 당신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면.
   나는 여전히 당신에게 반항해야 할까, 아니면 당신에게 순종해야 할까.

   이바라는 눈을 돌려 거실 한 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막을 걷었다. 그 너머로 밝게,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또 커다란 창문이었다. 그리고 아침에 작은 창문으로 보았던 차로가 바로 앞에 보였다. 너머의 수평선은 잘 보이지 않지만, 이바라는 저 너머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곳에 나기사가 없다는 사실도.
   눈을 감고 바다를 상상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 리스트 초절기교의 멜로디. 그 한가운데 서서 연주를 멈추지 않는 나기사. 너른 등이 움직이고, 손끝이 물결에 담기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뱃고동과 날아드는 갈매기, 석양을 연출해내는 태양, 반짝이는 윤슬, 사박사박 모래가 부서지고. 지금, 이바라의 상상 속에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와 비존재가 그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이바라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허공을 내리 갈랐다. 바다 위를 나는 한 마리 나비처럼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리지 않는 연주에 맞춰, 그러나 이미 몇 번이고 들어본 멜로디를 기억하며. 단 한 명의 피아니스트를 위한 지휘를 시작한다. 분명 무언가에 홀린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나기사가 이미 죽고, 제 몸을 그의 영혼이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기사와 연관되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이어지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연주가 멈추고 지휘도 끝이 났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절대로 만족할 수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신에게 반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바라는 숨을 한 번 내쉬고 앞으로 나아갔다. 차가운 바닷물이 신발과 양말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는데, 마치 단단히 결심한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바짓자락이 해조류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하반신이 바다에 전부 담겼을 때, 이바라는 검지 손가락으로 가까워진 수면을 만졌다. 햇빛이 반사되어 푸딩의 윗면처럼 탄력 있어 보이던 수면은, 손가락을 대는 순간 무수한 동심원을 그리며 허물어졌다. 이바라는 두 손을 쭉 펴고 열 손가락을 전부 물에 넣었다. 일렁이는 물결에 굴절된 손끝이 비쳤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피아노를 연주하는 척하려니 부끄럽고,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큼큼 헛기침을 하여 목을 가다듬었다. 우선 무슨 곡을 연주할지 정하는 게 순서려나. 하지만 각하가 계셨다면 분명,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마음에 맡기라고 하셨겠지. 자신은 하려고 노력해도 그런 원리로는 굴러갈 수 없다는 걸 모르시나.
결국 고른 곡은 ‘열정’이었다. 베토벤 소나타가 아니라 리스트의 연습곡. 그래, 꿈에서도 상상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나기사가 그렇게나 치던, 그 초절기교연습곡 10번 맞다. 사실 저는 악보를 몇 번 보고 주로 듣기만 했는지라 완벽히 알지는 못했다. 그럼 어떤가, 어차피 진짜 피아노도 아니라 소리도 안 나는데. 제가 젓가락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어도 멀리 행인에게는 제가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보일 것이다.

   "후…. 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조소를 머금고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파도를 견디며 페달을 밟을 자신은 없어서 하체는 그냥 포기했다. 솔직히 어느 부분에서 밟는지도 몰랐다. 모르는 부분이 많아 대강 얼버무리며 손을 놀렸다. 당연하지만, 역시 상상보다 훨씬 조용하구나. 어떤 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라면 어떤 음도 들릴 수 있다고 말할 테지만, 이바라는 그렇게까지 감수성이 풍부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 이상 미친 짓을 하고 싶지 않아서 연주는 중간에 끊겼다. 분명 그의 집에서 상상할 때는, 제가 마치 피아니스트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리라고 여겼다. 학과를 옮기고 나기사의 매니저를 자처한 이후로, 그가 떼를 쓰지 않으면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이 없었으니까. 적막 속에서 지휘할 때, 문득 바다라도 연주하고 싶어졌다. 확실히 누군가를 뒤에서 서포트하는 일은 제게 잘 맞고 좋아하는 일이지만, 가끔 피아노에 대한 그리움과 충동이 튀어나왔다. 바다로 뛰어든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역시 현실은 달라, 나답지 못하게 망상에 빠지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은 부끄러움이 파도를 타고 밀려오자 이바라는 얼른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뒤를 돌았다. 박수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멋진 연주였어."
   "가, 각하?"
   "응, 이바라. 나야."

 

   그토록 보고 싶던 얼굴이 거기 서 있었다.

 

6. stretta

   "아직 멀었다네, 쥰 군! 아직도 연주가 너무 딱딱해!"
   "말 돌리지 마시고요. 어제 했던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중이었잖아요? 나기 선배가 이바라 때문에 떠났다는 얘기를 이바라한테 하고, 제가 얼마나 시달렸는지 압니까?"

   "흥, 그건 쥰 군의 업보잖아? 내 탓은 전혀 없네!"
   "빌어먹을 아기씨, 지금 날 놀리는 거죠? 아무튼, 그게 무슨 뜻인데요? 왜 이바라 때문이라는 겁니까?"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무리 눈치 없는 쥰 군이라도, 두 사람을 가까이서 봐 왔으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히요리는 턱 밑에 손을 갖다 대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더니, 이내 싱긋 웃었다. 그리고 쥰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쥰은 듣더니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 나기 선배가 사실 이바라를 사랑하고 있다니요? 그러니까, 아기씨한테 늘 말하는 사랑과 다른 의미인 거죠? 꽤 자주 마주쳤지만 전혀…. 아니, 그보다 방금은 놀라서 지적하지 못했지만, 우리 둘뿐인 레슨실에서 굳이 귓속말할 이유가 있습니까?"
   "쥰 군은 역시 바보네! 벽에도 귀가 있고, 장지에도 눈이 있다는 속담도 있잖아. 그리고 이런 건 비밀스럽게 해야 듣는 사람이 더 놀라는 법이네!"

 

   히요리가 뿌듯하다는 듯 웃어 보이자 쥰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보고 한숨을 쉬다니, 예의가 없네, 쥰 군! 화를 내는 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던 쥰이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럼 이바라 녀석은 어쩌죠. 그 녀석은 자기 일에는 의외로 둔감해서 전혀 모르고 있을 텐데, 제가 말을 잘못해서 나기 선배랑 크게 싸움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으으, 걱정됩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거네. 나기사 군은 누군가와 다투는 걸 좋아하지 않는 부드러운 성격인 데다, 애초에 그와 다툴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도 나기사 군을 설득하려 할 테니, 싸움은 피하려고 하겠지."
   "호오? 웬일로 당신이 이바라를 깎아내리지 않네요?"
   "물론 독사는 엄청나게 밉지만, 싫어할 수는 없다는 거네! 그보다도…."

 

   나는 사랑의 힘을 믿고 싶어.
   히요리는 자신을 찾아왔던 이바라를 떠올렸다. 자존심뿐이던 그가 무릎을 꿇던 모습, 흔들리는 눈빛과 표정을 보고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히요리는 늘 낮은 자에게 베푸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기사를 알게 되고 쥰을 알게 되고 블러디 메리를 데려왔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오해는 금방 풀리겠지. 두 사람의 일은 어떻게든 될 것 같으니, 지금은 내 사랑에 더 집중해볼까. 히요리는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날카롭지만 순박한, 그래서 더욱 가까이 두고 싶은 이를.

   "저기요? 왜 말을 하다 마는 겁니까?"
   "그보다도, 쥰 군은 다시 레슨 시작해야지! 악보도 잘 외웠고 타건도 정확하지만, 곡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네. 이 곡은 좀 더 경쾌하고 생기 넘치게 연주해야 한다고. 자, 다시!"
   "젠장, 그래도 이 정도면 전보다 가벼워진 거라고요…. 아기씨는 피아노 연주에 관해서는 완벽주의 기질이 있는 거 같습니다만."
   "무슨 소리야, 예대에 들어오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네. 내 파트너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어! 하루빨리 성장해서 내 콘서트에 반주자로 서 달라는 거네!"
   "제멋대로 정하지 마시라고요. 젠장, 됐습니다. 각오하세요, 이번에야말로 그 잘난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일 연주를 해 보일 겁니다!"
   "그래, 그래! 바로 그런 자세네!"

   "많이 놀랐어, 이바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온종일 찾아다니던 사람이, 설마 제 호텔 근처에서 나타날 줄이야 알았겠습니까? 바다의 소리를 들으러 오라기에 온갖 해변에 다 다녀왔는데, 이래서는 정말 등하불명이라는 말이 맞네요."
   "나를 열심히 찾아줬구나, 이바라…. 나 감동했어."
   "그런 말이나 할 때입니까, 지금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자 신경질적인 말투가 불쑥 튀어나왔다. 물어볼 게 많았는데, 듣고자 했던 말도 많았는데 막상 이런 상황에서 만나니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이바라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나기사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저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무슨 말이야?"
   "피아노를 그만두신 이유가, 저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나기사가 말없이 저를 지나쳐갔다. 이바라는 놀라 뒤를 돌아 그를 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제게 등을 돌린 채였다. 오히려 얼굴을 보는 것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이바라. 사실 나, 네가 레이메이 학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너를 본 적이 있어."
   "저를, 말입니까?"
   "응. 멀리서 지켜보았을 뿐이지만. 네가 음악실에서 슈만의 환상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슈만 환상곡이라면, 제가 입학하고 치른 두 번째 연주평가의 시험 곡이었던가. 당시 최하점을 받은 충격에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있어, 그의 말을 듣자 금방 떠올랐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설마 제 연주가 형편없다고 험담이라도 할 생각은….

   "너무 행복해 보였어, 이바라. 네가 연주할 때의 그 표정은, 행복이라는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내 눈에 보였어."
   "그렇습니까."
   "그때 생각했어. 네가 교육받고 좋은 피아니스트로 자라나서, 다시 한 번 그 얼굴을 보고 싶다고. 아주 큰 공연장에서 울려 퍼지는 네 연주를 들으며, 네 공연의 관객으로서 말이야."

 

   나기사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뒤를 돌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너는 스스로 그 길을 포기했지. 처음에는 네 선택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바라, 내 연주를 점검하거나 공연 리허설을 감독할 때, 나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잖아."
   "제가 그랬습니까?"
   "응. 엄청나게. 간절하게 무대에 서고 싶은 표정이었어. 내 자리를 양보해주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가끔은 네게 콩쿠르에 같이 나가자고 조르기도 했지만, 역시 너는 무대에서 즐거워하면서도 내가 있으면 자기 감정을 숨기기 바빴잖아. 나는 네가 행복해하는, 즐거워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던 건데."
   "잠깐, 잠깐만요. 그러니까 지금 각하의 말씀은…."

 

   이바라는 침을 삼켰다. 어느덧 지고 있는 해가 그의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래, 그건 모두 석양 탓이었다. 겨우 당신을 포기하려는 참이었는데, 이런 말을 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속마음이 목까지 차오르고 심장은 달아나려 했다. 각하의 말씀은, 그 뒤 문장을 이을 수가 없었다.

 

   "비밀로 하지 않으면 이바라는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어. 이바라, 이제 내가 왜 피아노를 그만두었는지 알겠지."
   "저를…. 위해서였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를 사랑, 해서?"
   "하하. 이바라, 지금 엄청나게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어.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네. 맞아, 이바라를 너무 사랑해. 그중에서도 이바라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 짓는 표정을 가장 사랑해. 나는…."

   이바라의 미소를 사랑해.
   이바라의 행복을 사랑해.

 

   "이바라의 사랑을, 사랑해."

 

   흡사 사랑 고백 같은 말이었다. 아니지, 사랑 고백이었다. 이바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나기사가 자신의 손을 살며시 잡아 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바라가 피아노를 포기하도록 둘 수 없어. 이바라의 행복을 빼앗고 싶지 않아. 이바라는 나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것 같지만…. 내가 피아노 앞에 있지 않으면, 너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잖아. 나도, 피아노도."
   "내가, 제가 원한 것은 그게 아니라…."
   "또 거짓말. 아까도 그렇게 심취해서 바다를 연주했잖아."
   "그건, 당신을 따라 하려고 그랬던 겁니다!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면,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초대장에 쓰인 대로 연주회를 보러 가려고 말입니다. 그리고 어젯밤에 제게 하고 싶다던 말도 들으려 했습니다만."
   "응, 어쩌다 보니 그 말은 이미 해버렸네. 원래는 좀 더 낭만적으로, 연주회를 끝내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바라가 무대에 오를 줄은 생각도 못 해서.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내 연주를 들려주고 싶은데."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나? 비현실적인 감각에, 이바라는 나기사의 손에 이끌려 다시 바다로 들어갔다. 이제 보니 그도 한 차례 연주했던 건지, 바짓단이 입수하기도 전부터 젖어 있었다. 그라면 한 차례만이 아니라 제가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했겠지만.
   두 사람이 이윽고 바다의 한가운데 나란히 섰다. 나기사는 정말로 독주회라도 시작하려는 듯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손을 올렸다. 콩쿠르에 출전하는 때처럼 한쪽으로 내린 머리가 아니라, 하나로 묶은 머리였지만. 그의 모습은 이바라가 지켜봐 온 무수히 많은 공연을 떠올리게 했다.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기사는 자신의 연주를 듣고 있는 것처럼 몸을 멜로디에 맡겼다. 그리고 이바라는 그의 왼손이 멈추기 전까지,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아. 미안, 실수했네."
   "아직도 부상의 후유증이 남아계신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 뒤로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았더니. 종종 실수해."

 

   나기사는 새끼손가락으로 짚으려던 장소를, 손을 더 벌려 가운뎃손가락으로 짚었다. 새삼스럽게 그의 큰 손이 눈에 들어왔다. 제 손과는 다르게, 피아노에서는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수단이었지만, 손을 최대한 벌려도 치려던 공간에는 제대로 닿지 않았다. 극복할 수 없는 간극.
   이바라는 그것을 바라보다 그의 왼손 위에 제 왼손을 포갰다. 나기사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이렇게 독주회에 난입할 생각은 없었는데. 하지만 이바라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이 잠시 멈춘 새, 오른손마저 투명한 건반 위로 올려놓으며 말했다.

   "방심하시다가는, 공연의 주역을 빼앗겨버릴 겁니다."
   "응, 연주를 멈출 수는 없지."

 

   나기사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은색으로 물든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해가 지면 바다도 식어가겠지. 네 개의 손이 식어가는 바다 위를 질주했다. 때때로 손가락이 겹쳐질 때마다, 전기라도 흐르듯 심장이 따끔했다. 나기사는 악보대로 손을 움직이고, 이바라는 즉흥적으로 건반을 쳤다.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나지막이 울렸다.

 

   "이바라와 함께 연주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
   "저도 처음입니다."
   "이바라. 나,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들어줄래?"
   "말씀이나 해보세요."

 

   이바라는 손이 움직이는 물빛의 스펙트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기사는 그런 이바라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여전히 딱딱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저 가면을 한 겹 벗긴 민얼굴이 얼마나, 그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을지.

   "다시 피아노를 연주해줘. 나는 이바라가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면 좋겠어. 피아니스트의 매니저가 아니라."
   "그것참 웃기는 제안이군요."

 

   이바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제 옆의 상대를 바라봤다.

 

   "마침 저도, 각하의 복귀 건을 포기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엉망진창인 연탄이 이어졌다.

   임무는 실패했다.
   도쿄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 이바라는 좌석에 앉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있던 시간은 겨우 사나흘이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가. 이제는 정이 들어버릴 지경인 오키나와의 풍경과 이별해야 했다. 역시 감수성이 풍부하지는 않은지 별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이바라는 나기사가 시킨 대로 창밖의 땅을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하여간, 그 남자는 꼭 제게 이상한 것만 부탁한다.
   인사를 끝낸 이바라는 바로 창문의 블라인드를 닫고 좌석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손깍지에 힘을 주었다. 돌아가면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여름방학부터 준비해도 입학이 가능한 음악대학을 알아보는 일이겠지. 그리고 코즈믹 프로덕션의 부소장 자리에서 벗어나, 두 번째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올려야 했다.
   맞잡은 손을 한없이 강하게 쥐었다. 그러자 옆 좌석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너무 세게 잡지 말아줘, 이바라."
   "이거, 이거. 제가 힘 조절을 잘하지 못했군요. 죄송합니다, 각하."
   "그러고 보니, 매니저를 그만두고 나서도 나를 각하라고 부르는 거야?"

옆에 앉아있던 나기사가 은근슬쩍 이바라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며 물었다. 이바라는 굳이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다른 적당한 호칭이 있는지도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그런 대답을 할 뿐이었다.

   "각하. 갑자기 도쿄로 가게 되어, 아쉽지는 않으십니까?"
   "아니, 전혀. 이바라가 함께 있잖아."

   나기사의 휴학을 처리하는 것도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또 그가 살던 집과 재산을 어떻게 수거할지도 생각해봐야 했다. 정말이지, 너무 바쁘군. 이바라가 거기까지 고민했을 때, 나기사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내 집, 팔지 말고 그냥 별장으로 쓸까?"
   "별장 말입니까?"
   "응. 그리고 내년 여름에도 이곳에 오는 거야. 둘이서."

   이바라는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각하의 분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사실 내년 여름에는 어떤 콩쿠르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은 우선 덮어두기로 했다.
   마침 저도, 각하의 복귀 건을 포기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럴 수 없겠습니다. 각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더욱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바라는 자신이 그에게 했던 말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각하가 절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저도 각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각하께서 얼마나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으신지, 제가 모를 것 같았습니까? 저 혼자 피아니스트가 되고 각하께서 여기 남으면, 제가 만족스럽게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바라."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각오를 다지고 왔습니다. 두 번 다시는 각하를 제 시야에서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단 말입니다. 각하의 신하 되는 제가, 각하의 곁이 아닌 또 어딜 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지 마, 이바라. 넌 내게 종속되어서는 안 돼. 네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데…."
   "예, 그 말이 맞습니다. 저는 각하만큼이나 실력 있고 가치 있는 피아니스트지요. 그러니 더더욱, 당신을 무대 밑으로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제 유일한 라이벌이자 파트너인 당신을."

 

   제 귀에도 열렬한 사랑 고백처럼 들렸지만, 사에구사 이바라는 당시 지극히도 침착하고 냉정했다. 그러나 그 말은 한 톨의 거짓조차 없는 진심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차분하고 솔직한 발언을 할 수 있는지 자신도 놀라웠다.
   이바라는 나기사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감히 약속드리겠습니다. 각하가 바라시는 대로 피아니스트가 되어 클래식 업계를 제패할 겁니다. 그러니 각하도 약속해주십시오. 다시는 제 행복을 위해, 당신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이것이다. 나기사는 마치 모든 것을 준비해둔 사람처럼 굴었다. 대답도 빨랐고, 비행기 표 예매도 빨랐다. 이바라는 그에게 속은 기분이 들었지만, 묵고 있던 호텔 방이 아니라 그의 집에서 몸을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잠을 청한 기분이 나쁘지 않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축축한 신발을 끌고 집으로 향하던 나기사는, 대문이 보이자 대뜸 제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제 볼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아, 그 표정이네."
   "그 표정이요?"
   "처음 이바라를 봤을 때, 이바라의 표정. 그리고 피아노를 칠 때 하는 표정.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좀 더 경직된…."

 

   이바라는 고개를 돌려 나기사를 바라봤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어느새 잠들어버린 것 같았다. 고른 숨소리가 어떤 에튀드처럼 들려왔다. 들어본 적 없는 멜로디와 색으로, 마치 온 여름을 물들일 것처럼.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각하께서는 아직 이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하시는 거로군요. 저 또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이바라는 다시 한 번, 그 말을 속삭였다.
   설렘,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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